• 운암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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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만해 한용운의 지도 아래 운암 김성숙선생은 3·1운동에 뛰어들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고, 경기도 포천과 양주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제작·배포하였다.
자유롭게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항일독립투쟁

  • 경기도 광주 봉선사에서 받은 1916년 12월 3일 발급된 도첩

운암 김성숙 선생은 항일독립투쟁에 뛰어든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항일독립투쟁을 결심했으며, 집을 나와 평양에서 원산으로 향하던 중, 봉선사 월초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했고, 그를 따라 용문사로 가서 출가하였다.

  • 경기도 봉선사에서 1917년 7월 15일 발급된 사미과정 수료증

운암 김성숙 선생은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렀으며, 월초스님에게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또한,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만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승려인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인 격문을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살포하였고,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1920년 출소하여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이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한 합법적 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열단
1923년 북경 민국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의용대
1926년 광동으로 건너가 중국 사회주의 혁명인 광동코뮨에 참가한 후, 상해로 돌아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한 그는 한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6년도에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민족전선 네 단체,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그는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 의열단이란?일제의 무력에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대항하기 위해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모의 집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이다.
  • 활동 기간1919 ~ 1935년
  • 설립목적평화적인 3·1독립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하였다.
7가살 (七可殺)

1. 조선 총독 이하 고관
2. 군부 수뇌
3. 대만 총독
4. 매국노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 악덕 지주

5파괴 (五破壞)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왜적 중요 기관

공약 10조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희생하기로 함.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

의열단 주요 사건

1920년 3월 ‘밀양 폭탄 반입 사건‘ 이래, 항일 투쟁의 방향전환을 모색하는 1925년 무렵까지 수백여 차례의 활동성과 중에서 세상에 알려진 사건은 다음과 같다.

초창기 의열단 단원
의열단 단원

고문 :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奎)·김성숙(金星淑)

단장 : 김원봉(金元鳳) 단원 :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鍾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

주요 사건의 대표적인 단원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 김상옥, 김지섭, 김병현, 김광추, 박희관, 나석주 등

운암 김성숙 선생의 의열단 연표

  • 1920

    신채호, 유우근 등의 추천으로 의열단에 가담

    선전부장으로 활동

    김원봉에게 김익상을 소개하여 의열단에 가입시킴

  • 1922

    의열단원 장지락에게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르침

  • 1923

    중국민국대학에서 의열단원 및 한인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적인 근대정치사상을 섭렵

  • 1924

    의열단 김원봉, 손두환과 함께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이었던 장제스를 찾아가 입교를 교섭

    장지락, 김원봉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교 졸업생들을 포섭하여
    가열단에 100명이 넘는 단원을 가입시킴

  • 1926

    12월 의열단 총회에서 의열단 체제를 ‘혁명정당’으로 개편

    의열단 조직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체제의 개편에 따라 의열단 강령을 작성

    12월 나석주 의사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의거를
    위한 폭탄 등을 웨이하이웨이까지 한봉근과 함께 운반함

  • 1927

    유월한국혁명동지회 집행위원 및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서 장건상을 만나 대독립당 촉성회 운동을 논의

    의열단을 암살과 파괴에 치중한 단체로부터 혁명조직으로 변환시킴

    안광천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내 협동전선론자를 연합하고 레닌주의 정치 학교를 개교

  • 1933

    의열단 비밀지부(서울,평양, 강릉, 원산)을 결성

    의열단 내 이육사, 노석정 국내 파견 주도

  • 1935

    의열단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중국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 청사

기간
1919년 ~ 1948년
성격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
설립목적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
주요 역할
1919년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함
상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
동포사회에 총괄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통합하는데 주력함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였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함

임시정부 국무 요인

  • 1942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회 선전위원으로 선임

    1월 26일 국무회의에서 '3.1절 기념준비위원'으로 선전조 주임으로 선임

    10월 11일 중한문화협회 선전조 이사에 선임

    10월 17일 제1차 이사·감사회의 선전조 부주임에 선임

  • 1943

    2월 3일 국무회의에서 아내 두군혜가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됨

    3월 30일 신관제에 따라 두군혜는 외무부 과원이 됨

    3월 4일 내무부장의 추천으로 내무부 차장에 임명됨

    4월10일 국무회의에서 선전부 선전위원에 선임

  • 1944

    4월 20일 제 36회 임시의정원의 회의 기간 중 4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선거에서 국무위원 당선

  • 1945

    3월 15일 한국구제총회에 감사로 선임

    4월 25일~6월 26일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이승만의 반소· 반공활동 소식을 듣고,
    이승만의 면직을 제안하였으나 통과되지 않음

    귀국 후, 집권세력에 의해 견제, 핍박 받으며 인내와 저항의 정치역정을 걸음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941년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및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임시정부 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설치되었고 총무, 편집, 발행의 3과가 함께 선전위원회로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조소앙, 신익희 등 14명과 함께 선전 계획을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나는 임시정부를 새로이 강화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있는 모든 정치세력은 임정에 집중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내가 나섰지. 나부터 솔선해서 임정에 가담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지. …내가 김원봉이 하고 굉장히 싸움을 해가지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임정에 가담 시켰지요."

-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김성숙·장건상·정화암·이강훈의 독립투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