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암김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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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김성숙(金星淑) : 1898.03.10 ~ 1969.04.12
호(號) : 운암(雲巖)
이명(異名) : 규광(奎光), 충창(忠昌), 창숙(昌淑), 성숙(星淑)
연대 나이 행적 국내외 정세
1898 1 평안북도 철산군 (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출생(3월10일). 이후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으로 전적.
  • 독립협회, 종로에서 만민공동회 개최.
  • 경부철도 부설권 일본인에 허가.
  •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 습격
1907 9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움. 경술국치 이후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김성숙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침. 이 때 배운 한문이 불교경전을 배우는 등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됨.
  • 서대문-청량리간 전차 개통(‘89).
  •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조인. 의병재봉기. 일진회조직.(‘04)
  • 을사5조약 강제체결.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민영환 자결. 의병봉기 전국 확대. 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05)
1907 9 조국에 대한 사랑이 싹틀 무렵 김성숙은 그의 집을 찾아온 삼촌의 영향을 받게 됨. 김성숙의 삼촌은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로 김성숙은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
  • 국채보상 (國債報償)운동 전개
  • 헤이그 특사 파견
  • 정미7조약 체결. 고종퇴위, 순종즉위
1916 18 봄, 신흥군관학교에 입학하려고 봉천으로 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가에 입문.
  • 일본 육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에 임명
1916~1918 18~20 경기도 용문사에서 오신 풍곡 신원 (楓谷 信元) 선사를 만나게 되고 그 길로 선사를 따라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계시던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음
  • 뉴욕서 세계약소민족대표회의 개최. 러시아 혁명 발발(‘17)
1918 20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 교리를 공부. 월초스님의 소개로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
  • 독일·연합국간의 휴전협정 조인으로 제 1차 세계대전 종결.
1919 21 경기도 남양주군 (南楊州郡) 진접면(榛接面) 봉선사 승려로 있을 때 3 .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승려인 이순재(李淳載), 김석로(金錫魯), 강완수(姜完洙)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다 일경에게 체포.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
  •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 국내의 13도 대표 한성정부 선포
  • 중국 5.4 운동
1920 22 출옥한 김성숙은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킴. 1920년에 일제가 문화정치(文化政治)를 표방하자 합법적으로 조직된 무산자동맹 (無産者同盟)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에 참석. 노동공제회에서 김성숙은 충북 괴산(槐山)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小作爭議)의 진상을 서울 본회 및 각 지방 지회 (支會)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전개.
  • 국내 민간 신문《동아일보》《조선일보》창간
  • 청산리 대첩
  • 유관순 순국
  • 인도의 간디 반영운동 개시
1922 24 승려 신분으로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 활발한 활동.
  • 의열단원 오성륜 등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田中義一 저격실패.
  • 상해에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조직.
  • 김규식(金奎植)이 모스크바 극동무산자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1923 25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북경 (北京)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 (創一黨)'을 조직,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해 사회운동의 분열을 반대. 김산(장지락)의 스승으로서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맹. 조선의열단에서 승려신분임에도 선전부장(宣傳部長) 으로서 왕성히 활동.
  •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
  • 국민대표회의, 임정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개조 양파로 분열.
  • 관동대지진. 일본, 유언비어를 퍼뜨려 한국인 학살.
  • 김상옥 의사 순국
1925 27 1925년 중국의 중산 손문 선생이 영도하는 국민혁명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북경정부의 적시가 되어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돼 광동성 광주시 소재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김. 정치경제학을 전공.
  • 임시정부, 이승만 탄핵안의결.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
  • 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사임.
  • 이상룡, 임시정부 국무령에 임명됨 .
1926 28 3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유학한국혁명 청년회를 조직해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제창했다.
  • ‘동광'지 창간
  • 6.10 만세 사건
  •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1928 30 중산대 졸업 . 광둥코뮨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자 애인인 두군혜(杜君慧)의 집에 피신.
  • 신간회(新幹會) 조직
  • 중국 南昌봉기.
1928~1931 30~33 상해로 이주 .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在中國朝鮮靑年總聯盟)을 조직. 중국 문화총동맹과 작가연맹에 가입, 신문화운동 전개(‘29).
  • 일본군, 산동성 濟南에서 국민정부군과 충돌.
  • 중국, 북벌전쟁 종결.
  • 장개석, 국민정부 주석 취임.
1932 34 백숭도 (白崇禱) 장군의 추천으로 중국 광서성 성립(省立)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로 활동. 생애 유일의 안식기를 보냄.
  • 중국 공산당, 강서근거지(江西根據地) 포기하고 대장정 시작.
1934~1935 36~37 다시 상해로 돌아온 이후 ' 30년대 전반기까지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 20여권 책을 번역 또는 저술하며 진보적 문필가로도 명성.
1936 38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 . 기관지 《민족해방》을 편집.간행함.
  • 일제, 사상범보호관찰령 공포.
  • 장개석, 서안에서 장학량에 의해 구금된 서안사변 발생.
1937 39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조직,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민족전선》을 편집. 간행함.
1938 40 광복진영 (光復陣營)의 9개 단체가 광복군에 편입, 김성숙이 참여한 민족전선(民族戰線)의 네 단체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의용대통신》을 편집.간행함.
  • 일본군, 청도(靑島)상륙.
  • 일본, 국가총동원법 공포.
  • 일본군, 한구·무창·광동 등 점령.
1939~1941 41~43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은 한국광복전선과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대일항전의 지장을 막고 임시정부로 총단결할 것을 주장 . 41년 6월 손문(孫文)의 아들 손과(孫科)가 회장, 한국독립당 조소앙과 김규식이 부회장으로 참여한 한중문화협회에 상임이사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
  • 국민정부 (國民政府)수립.
  • ‘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42년 7월 조선의용대 일부 흡수해서 3개 지대로 개편, 김원봉이 부사령관으로 취임.
  • 일본·독일·이태리, 삼국동맹 결성.
  • 일본군, 산서(山西)의 팔로군(八路軍) 공격.
1926 28 3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유학한국혁명 청년회를 조직해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제창했다.
  • ‘동광'지 창간
  • 6.10 만세 사건
  •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1926 28 3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유학한국혁명 청년회를 조직해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제창했다.
  • ‘동광'지 창간
  • 6.10 만세 사건
  •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1926 28 3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유학한국혁명 청년회를 조직해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하며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제창했다.
  • ‘동광'지 창간
  • 6.10 만세 사건
  •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1942 44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 .
  • 일본 수상,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건설의 지도방침 표명.
  • 한중문화협회 결성.
  • 조선어학회 사건 발생.
1943 45 2월 : 박찬익(朴贊翊) 최동오(崔東旿) 유 림(柳林)과 함께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연구위원으로 임명돼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對列强外交活動)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4월 : 임시정부 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宣傳部)가 설치됨. 이 선전부에는 총무, 편집, 발행의 3과(課)와 함께 선전위원회가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사업과 각종 선전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함. 김성숙은 조소앙(趙素昻) 신익희 (申翼熙) 등 14명과 함께 선전계획의 수립, 선전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활동. 임정 국무위원 으로 선출(‘43). 무임소 국무위원(‘44년)
  • 이탈리아, 연합군에 항복.
  • 일제,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
  • 미·영·중 3거두, 카이로 회의에서 한국독립 선언.
1945 47 일제의 연합군에 대한 무조건 항복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종결(8월15일). 다른 임정요인 (臨政要人)들과 함께 중경(重慶)의 임시정부 청사를 철수, 상해로 향함(11월5일), ‘입국 전 약법3장' 발표. 같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진(洪震)·조성환(曺成煥)· 신익희·조소앙 등 13명과 이계현(李啓賢)·서상열(徐相烈) 외 9명을 포함한 23명이 상해를 출발, 군산(群山)비행장에 도착(12월1일). 서울로 들어옴(12월2일).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힘.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침. (ㆍ 입국 전 약법 3장 : 1. 임정은 좌우 어느 파에도 편향되지 않고 초연한 입장에서 양파의 대립을 해소시켜 나간다. 2. 비상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임정헌법의 국호, 연호를 채택하며 임정의 정원을 확대.개편해 한국민주정부를 재조직한다. 3. 미.소에 대해서는 평등한 원칙 아래 외교관계를 세운다. 이 같은 김성숙의 입국 전 약법 3장은 1945년 12월3일 경교장에서 열린 임정 구무위원회에서 약법 장의 결행을 촉구해 다수의 결정으로비상국민대표회의 소집을 결행.)
  • 일본군에 끌려간 학병 50여명, 탈출, 중경 임시정부로 찾아옴.
  • 탈출 학병 환영대회. 미국·소련·영국 얄타회담 개최.
  • 임시정부, 중국과 새 군사협정을 체결.
  • 미·영·중 3거두, 포츠담 선언.
  •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이승만을 중심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발족.
  • 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신탁통치 결의. 신탁통치 반대운동 전국적으로 전개됨.
1946 48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 , 임정의 김구, 김규식 등이 외국 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에 소속된다는 것은 민족과 일찍 숨진 독립운동가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하며 장건상, 김원봉, 성주식 등과 함께 임정을 떠남. 민주주의 민족전선 (약칭: 민전)에 가입하여 부의장을 엮임. 미군정을 반대한 혐의로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름.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 민주정부수립촉진 시민대회 개최.
  • 이승만,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 발언.
  • 좌우합작 7원칙 발표.
  •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1947 49 근로인민당 (여운형)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에 선출.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당내 좌파계열 월북 등으로 ‘49년 12월 공식 해체.
  •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
  • 한국문제 UN 이관.
  • UN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 총선 가결.
  • 장덕수 피살. 중간파 연합전선으로 민족자주연맹 결성.
1950~1951 52~53 제 2대 민의원선거 경기도 고양군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 6.25 발발. 조선노동당의 합류 유혹을 뿌리치고 피신함. ‘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정부가 ‘부역자'로 체포, 1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
1955 57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관여 . 5.16 이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름.
  • 동유럽 8개국과 소련, 바르샤바 조약 체결.
1957 59 진보당과 민주혁신당 양쪽에서 입당 또는 협력의 교섭을 받았으나 재야혁신세력을 규합한 민주혁신당을 선택해 정치위원으로 피선. 혁신세력대동통일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은 물론 노농당, 대중당까지 모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함. 이승만 정권은 김성숙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체포,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름.
  • 유엔총회, 유엔 감시하의 통한(統韓)총선거 결의
1960 62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을 창당 , 11인의 총무위원회위원으로 선출. 제5대 민의원선거에 고양군에서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
  • 4.19 혁명, 이승만 하야.
1961 63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선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냄.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 석방됨
  • 5.16 군사정변(쿠데타)
1965 67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발기 , 대표위원으로 추대됨.
1966 68 신한당에 발기인으로 참여 , 정무위원으로 활약함.
1967 69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 , 운영위원으로 활약함.
1968 70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선출됐으니 오랜 가난과 병고에 시달려 고통 받고 있었음 .
1982 서거 13주년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2004 서거 35주년 7월 28일 국립묘지 유해 안장
2008 서거 39주년 4월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