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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김성숙(金星淑) : 1898.03.10 ~ 1969.04.12
호(號) : 운암(雲巖)
이명(異名) : 규광(奎光), 충창(忠昌), 창숙(昌淑), 성암(星巖), 야광(夜光)
기간 주요활동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3월 10일), 이후 경기도 고양군으로 전적
~1907년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움
조부에게 직접 한문을 배운 것이 불교경전 등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됨
1907년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을 결심
1916년 신흥군관학교에 입학하려고 봉천으로 가려다 불가에 입문
1916~18년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 봉선사에 계시던 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음
1918년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 교리를 공부,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리에 독립 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1920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며 적극적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
1922년 승려 신분으로 조선 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함
1923년 북경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장건상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조직, 《혁명》이란 기관지 발행 및 배포, 의열단에 가맹하여 승려신분임에도 선전부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
1925년 『고려유학생회』를 확대, ‘반역사’라는 비밀결사 활동 , 중국광저우로 피신 중산대학 법과에 입학 의열단 활동
1926년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조직,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 반대와 피압박 민족의 해방 제창
1928년 중산대 졸업 후, 광동코뮨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두군혜 집에 피신
1928~31년 중국 상해로 이주하여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
1932년 중국 백숭도 장군의 추천으로 중국 광시성 성립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로 활동
1934~35년 상해로 돌아온 이후 30년대 전반기까지 20여권의 책을 번역 또는 저술하며 진보적 문필가로도 명성이 남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민족해방》을 간행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조직하였고,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민족전선》을 간행
1938년 민족전선을 중심으로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정치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의용대통신》을 간행
1939~41년 조선민족해방동맹 활동하며, 41년 6월 한중문화협회에 상임이사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
1942년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 후 내무차장으로 취임
1944년 4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당선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환국,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침
1946년 임시정부가 미군정 자문기관인 미주 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임정을 떠남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입 부의장을 역임
1947년 근로인민당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출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부역자'로 체포되어 1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
1955년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관여하였다가 5.16이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옥고
1957년 혁신세력대동통일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은 물론 노동당, 대중당까지 모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
1960년
  •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을 창당, 11인의 총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제 5대 민의원 선거 고양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됨
1961년
  •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선출
  • 5.16군사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 찍힌 그는 '반국가행위' 죄목으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던 중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되어 석방
1965년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발기, 대표위원으로 추대
1966년 신한당에 발기인으로 참여, 정무위원으로 활약
1967년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 운영위원으로 활약
1968년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선출
1969년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피우정(避雨亭)’을 지어주었으며, 4월 12일 별세함
1982년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함
2004년 7월28일 국립묘지 유해 안장
2008년 4월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