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암김성숙
-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소개
- 운암김성숙
- 연보
연보
- 김성숙(金星淑) : 1898.04.29(음 03.10) ~ 1969.04.12
- 호(號) : 운암(雲巖)
- 이명(異名) : 성암(星巖), 충창(忠昌), 규광(奎光), 창숙(昌淑), 야광(夜光)
기간 | 주요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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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 이후 경기도 고양군으로 전적 |
~1907년 |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움 조부에게 직접 한문을 배운 것이 불교경전 등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됨 |
1907년 |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을 결심 |
1916년 |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봉천으로 가려다 불가에 입문 |
1916~18년 |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 봉선사에 계시던 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이란 법명을 받음 |
1918년 |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 교리를 공부,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 |
1919년 |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리에 독립 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
1920년 |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중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며 적극적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 |
1922년 | 승려 신분으로 조선 무산자 동맹과 조선 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함 |
1923년 | 북경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장건상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조직, 《혁명》이란 기관지 발행 및 배포, 의열단에 가맹하여 승려신분임에도 선전부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 |
1925년 | 『고려유학생회』를 확대, ‘반역사’라는 비밀결사 활동 , 중국광저우로 피신 중산대학 법과에 입학 의열단 활동 |
1926년 | 『유월한국혁명청년회』 조직, 《혁명운동》을 편집 간행,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 반대와 피압박 민족의 해방 제창 |
1928년 | 중산대 졸업 후, 광동코뮨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두군혜 집에 피신 |
1928~31년 | 중국 상해로 이주하여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 |
1932년 | 중국 백숭도 장군의 추천으로 중국 광시성 성립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수로 활동 |
1934~35년 | 상해로 돌아온 이후 30년대 전반기까지 20여권의 책을 번역 또는 저술하며 진보적 문필가로도 명성이 남 |
1936년 |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민족해방》을 간행 |
1937년 |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조직하였고,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민족전선》을 간행 |
1938년 | 민족전선을 중심으로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정치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의용대통신》을 간행 |
1939~41년 | 조선민족해방동맹 활동하며, 41년 6월 한중문화협회에 상임이사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 |
1942년 |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 후 내무차장으로 취임 |
1944년 | 4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당선 |
1945년 | 제 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환국,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침 |
1946년 | 임시정부가 미군정 자문기관인 미주 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임정을 떠남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입 부의장을 역임 |
1947년 | 근로인민당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출 |
1951년 |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부역자'로 체포되어 1개월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 |
1957년 | 혁신세력대동통일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은 물론 노동당, 대중당까지 모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승만 정권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 |
19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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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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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 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발기, 대표위원으로 추대 |
1966년 | 신한당에 발기인으로 참여, 정무위원으로 활약 |
1967년 | 신한당과 민중당의 통합으로 신민당 창당, 운영위원으로 활약 |
1968년 |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선출 |
1969년 |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피우정(避雨亭)’을 지어줌, 4월 12일 별세함 |
1982년 |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함 |
2004년 | 7월28일 국립묘지 유해 안장 |
2008년 | 4월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