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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1898-1969)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1898-1969)선생은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 의열단, 광주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좌우가 통합된 중경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선전위원,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민주투사이자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일독립지사이다.

상산 김씨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상주 김씨(尙州金氏)라고도 하며, 경순왕의 후손 수(需)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삼원수(三元帥)' 득배(得培), 득제(得齊), 선치(先致) 3형제가 고려 때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좌의정 귀영(貴榮), 대사헌 덕함, 판서 우석(禹錫), 연(演), 동필 (東弼) 등이 배출 되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상산군파 32대 손으로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 철산문중에서 아버지 문환(文煥),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趙氏) 사이에서 태어나 가문을 대표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대충(大忠)을 몸소 실천하였다.

항일독립투쟁

  • 경기도 광주 봉은사에서 받은 1916년 12월 3일 발급된 도첩

운암 김성숙 선생은 항일독립투쟁에 뛰어든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항일독립투쟁을 결심했으며, 집을 나와 평양에서 원산으로 향하던 중, 봉선사 스님인 월초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했고, 그를 따라 용문사로 가서 출가하였다.

  • 경기도 봉선사에서 1917년 7월 15일 발급된 사미과정 수료증

운암 김성숙 선생은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렀으며, 월초스님에게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또한,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만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승려인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 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음으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인 격문을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살포하였고,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1920년 출소하여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이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또한 합법적 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의열단
1923년 북경 민국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조선의용대
1926년 광동으로 건너가 중국 사회주의 혁명인 광동코뮨에 참가한 후, 상해로 돌아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한 그는 한인 청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6년도에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민족전선 네 단체,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그는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941년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및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임시정부 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설치되었고 총무, 편집, 발행의 3과가 함께 선전위원회로 설치되어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괄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조소앙, 신익희 등 14명과 함께 선전 계획을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나는 임시정부를 새로이 강화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있는 모든 정치세력은 임정에 집중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내가 나섰지. 나부터 솔선해서 임정에 가담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지. …내가 김원봉이 하고 굉장히 싸움을 해가지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임정에 가담 시켰지요."

-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김성숙·장건상·정화암·이강훈의 독립투쟁』 中

해방 후 정치활동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고 1955년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하였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루게 되었으나 독립유공자임이 감안돼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출감 이후 1965년 혁신정당(신민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피우정(避雨亭)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자신보다 남을 돌보던 운암 김성숙 선생의 말년은 가난과 병고로 힘든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지인들이 마련한 11평짜리 방 한 칸이 바로 ‘피우정’이다.

피우정은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대지 20평을 제공하고 지인들이 207,500원을 모금하여, 1964년 건립되었고,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나 피하라'는 뜻으로 피우정(避雨亭)이라 명명하였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969년 4월 12일 71세의 나이로 피우정(避雨亭)에서 별세하였다. 이에 정부는 사회장으로 조계사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피우정 터 :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210-10 (舊 주소: 성동구 구의리 236-6)

독립장

친지: 그토록 독립운동을 했는데 고작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못쓴 채 돌아가셔야 되겠느냐.

운암선생: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

- 『운암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中 

운암 김성숙 선생 서거 후 13년이 지나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의하여 1982년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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