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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1898-1969)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1898-1969)선생은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 의열단, 광저우 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좌우가 통합된 중경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선전위원,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민주투사이자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일독립지사이다.

묘비명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사상과 지조로써 살고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1898년에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 … 기미년에 옥고를 치른 뒤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산대학 정치학과를 마치고 베이징·광둥·상하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단체들을 통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가 다시 모든 단체들을 임시정부로 총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만나니 48세였다.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갖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없이 살다가 1969년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지냈다.”

상산 김씨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상주 김씨(尙州金氏)라고도 하며, 경순왕의 후손 수(需)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삼원수(三元帥)' 득배(得培), 득제(得齊), 선치(先致) 3형제가 고려 때 이름을 떨쳤다. 조선시대에는 좌의정 귀영(貴榮), 대사헌 덕함(德諴), 판서 우석(禹錫), 연(演), 동필(東弼) 등이 배출 되었다. 운암 김성숙선생은 상산군파 32대 손으로 평안북도(平安北道)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 철산문중에서 아버지 문환(文煥),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趙氏) 사이에서 태어나 가문을 대표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대충(大忠)을 몸소 실천하였다.

피우정(避雨亭)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자신보다 남을 돌보던 운암 김성숙 선생의 말년은 가난과 병고로 힘든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지인들이 마련한 11평짜리 방 한 칸이 바로 ‘피우정’이다.

피우정은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대지 20평을 제공하고 지인들이 207,500원을 모금하여, 1964년 건립되었고,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나 피하라'는 뜻으로 피우정(避雨亭)이라 명명하였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969년 4월 12일 71세의 나이로 피우정(避雨亭)에서 별세하였다. 이에 정부는 사회장으로 조계사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피우정 터 :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210-10 (舊 주소: 성동구 구의리 236-6)

독립장

친지: 그토록 독립운동을 했는데 고작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못쓴 채 돌아가셔야 되겠느냐.

운암선생: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

- 『운암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中 

운암 김성숙 선생 서거 후 13년이 지나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의하여 1982년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