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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이념

운암김성숙

결심

어린시절 운암은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웠다.
을사늑약 이후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운암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이때 배운 한문이 불교경전을 배우는 등 그의 학문의 밑거름이 된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싹틀 무렵 운암은 그의 집을 찾아온 삼촌의 영향을 받게 된다. 운암의 삼촌은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삼촌으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운암은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실린 운암의 회고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운동의 시작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기획전

위인들의 생애를 통해 형성된 민족애의 정신위에 가슴깊이 뿌리내린 조국독립의 염원은 운암의 일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이념적 기틀위에 평생을 ‘성숙(星淑)’이라는 법명으로 살았던 운암에게 있어서 불교는 운암 사상의 한 획을 긋는다.

독립군이 되려고 만주로 향하던 청년 운암은 우연히 불교를 접하게 되고, 젊은 시절을 스님으로 살아간다.

봉선사에서 3년간 머물면서 운암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와 만해스님도 만나 독립운동의 열정에 다시금 불을 지피게 된다. 그들과의 인연으로 운암도 3.1운동에 가담한다. 그는 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 설립기념사진 1938년 10월 10일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사상이 퍼져있었다. 운암도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으며 자신이 사회주의에 발을 들인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 가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

국내에서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스님 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 기틀을 다지는 한편, 장건상, 양명, 장지락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했다.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던 그는 1926년 광동으로 가 광동코뮨에 참가했다가 실패한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또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요인 2진 귀국기념사진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임정을 떠나게된다.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에 뒀던 운암, 그는 해방 이후에는 좌 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되는 날까지 숨가쁘게 투쟁해왔던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 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 좌익인물이라는 낙인, 그리고 박해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나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석방될 수 있었다.

신동아에 실린 ‘김성숙 회고록 - 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말’에는 해방 이후 고단했던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1969년 4월15일에 실린 동아일보 기사 표제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였다. 운암의 일생이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운암에게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김성숙유묵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그가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다.

운암은 ‘혁신계인사’ 또는 ‘중간파’로 분류되는 중심적 인물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굴절과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른바 ‘중간파’의 몰락을 드는 이들이 많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설자리를 잃고 정치적 낭인으로 떠돌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 이들이 중간파다. 좌우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의 꿈도 이들의 좌절과 함께 파산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김재명씨가 쓴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은 청춘을 바쳐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웠으면서도 아무 것도 돌려받지 못한 채 스러진 중간파 인물들의 삶을 추적한 연구서로 이 책에서 중간파란 이름으로 묶여 소개되는 이들은 모두 30년 안팎의 긴 세월 동안 풍찬노숙하며 항일투쟁에 몸 바친 인물들이며 한결같이 “극좌·극우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일에 온 힘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친미적인 세력이나, 그에게 빌붙은 친일파들의 극우 노선을 비판했고 극좌 노선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극우파는 이들을 기회주의적 친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고, 극좌파는 이들을 회색적 기회주의자로 비판했다.”

이들이 정말 ‘기회주의자’였을까 지은이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에게서 기회주의적 면모를 느끼기는커녕, 지나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지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알다시피 운암이 걸었던 길은 기회주의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지은이는 협상과 대화로써 민족의 통일을 이루려 했던 이 중간파들을 ‘민족 양심 세력’이라고 규정하며, 분단 극복이 최대 과제로 남아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들의 이상주의적인 통일 염원을 되새기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운암의 사상을 부득불 간략히 정리해 보면 민족사랑에 근간을 둔 민족주의에서 불교로,민족적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복지국가건설 이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또한 이승만, 박정희 정권 아래 무명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대만에서 ‘운암 김성숙’선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파란만장한 운암 김성숙의 생애를 관통해서 그의 사상과 이념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간단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