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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안경근, 이덕주, 최흥식 선생
관리자
조회수 : 116   |   2022-06-07


생몰연도 및 훈격

 

안경근 (安敬根 1896 ~ 1978), 건국훈장 독립장(1977)

이덕주 (李德柱 1908 ~ 1935), 건국훈장 애국장(1990)

최흥식 (崔興植 생몰일 미상), 건국훈장 애국장(1991)

 

 

공적상세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2022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ㅇ 한인애국단은 김구선생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이다.

윤봉길의사 의거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덕주, 최흥식 선생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독립운동의 의지는 많은 곳에 알린 중요한 의거였다.

 

이덕주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24살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ㅇ 이덕주가 조선총독 처단 의거에 나선 것은 단장인 김구가 주장한 독립 의지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임시정부의 재정확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에 공감해서 그 제안을 수락했다.

ㅇ 유진식과 국내에 파견된 이덕주는 신천 도착 후부터 이미 그를 예의주시하던 신천경찰이 이덕주가 신천여관에서 거주 불명의 인물과 만나자 2명을 붙잡아 취조 중 조선총독 처단 준비 사실을 발각하면서 의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ㅇ 이후 이덕주는 1932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 평양형무소로 이감 후 1935212일 까지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적에 부모를 여의고 형과 함께 지냈다.

ㅇ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20살에 독립운동이라는 큰 포부를 가지고 중국 망명을 결심하였다.

 

ㅇ 상해 도착 후에는 먼저 윤봉길이 취직해 있던 종품공사(鬃品公司)에서 1931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였다.

 

ㅇ 최흥식이 단장 김구를 만나 특무작전을 제안받은 것은 19322월경이었다. 먼저 그는 조선총독 처단 임무가 적힌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안공근의 집에서 사진을 찍었다.

ㅇ 최흥식은 상해에서 대련으로 출발할 때 단장 김구에게 관동군 사령관등을 처단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처단방법은 열차로 움직이거나 타고 내릴 때 폭탄 또는 권총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ㅇ 하지만 거사일을 이틀 앞둔 1932524, 최흥식이 일경에 붙잡히면서 결국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후 최흥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판결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이기도 한 안경근은 황해도 신천에서 안태민(安泰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가족 모두 국내에 남겨둔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상해로 온 안경근은 19224월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 입학을 위해 상해를 출발해 192412월 학업을 마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1931년 말 한인애국단이 결성되자 단원으로 참여했으나 단장 김구가 계획한 의열투쟁에 나서는 등 직접적인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1932429일 윤봉길 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가 단장 김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자 그를 보필하면서 김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ㅇ 윤봉길의 상해의거를 결실로 중국 측의 지원을 받아 1934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 특별반이 설립되자 안경근은 생도계를 맡았다. 중국측의 지원으로 중국 군관학교를 통해 한인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어 안경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ㅇ 안경근은2, 3의 한인애국단원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한 것은 물론, 김구 직계 가족의 연락소통 및 김구와 동행하며 그의 신변 경호업무도 함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ㅇ 또한 항일 특무활동도 병행하였다. 19335월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과 협력하여 일제 밀정노릇을 하던 안공근의 처조카 이종홍을 처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ㅇ 주로 김구를 보필한 안경근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2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47716일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대일 군사활동을 지도할 기구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9명의 군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ㅇ 해방 후 19465월 귀국한 안경근은 경교장에 기거하며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김구를 보필하였다.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앞두고 김구의 특사로 4월 초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ㅇ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내려가 반독재통일운동을 위해 활동을 이어나가던 안경근은 1978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이덕주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최흥식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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