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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관리자
조회수 : 242   |   2019-07-31



생몰연도 : 1876 ~ 1949

 

훈격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공적개요

 

- 1904년 애국계몽운동

 

- 1919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 취임

 

-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활동 지휘

 

- 1940년 임시정부 주석

 

공적상세

 

1876711(양력 8.29)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金淳永)과 모친 현풍 곽씨(玄風郭氏) 낙원(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다른 이름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 ()를 쓰고,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1879(4)에 천연두를 앓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9세가 되던 1884년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이름이 나도는 타락한 과거시험에 실망을 느꼈다. 그 뒤로 선생은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읽어 나갔다. 관상공부를 하던 선생은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아 크게 실망하다가, 그 책에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는 구절에 빠졌다.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이 말에 선생은 호심인(好心人)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이듬해(1893)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힌 선생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로 임명되었다. 18949월 탐관오리를 내쫓고 서양오랑캐와 왜를 물리치자는 깃발을 올리며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나라 위한 평생의 첫 걸음이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20세 되던 18952월 동학 봉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선생은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맡겼다.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나섰으니, 어린 날 두 영웅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학자인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고 선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일사보국하는 길을 일러주면서,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 들 것이니,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인물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공감한 선생은 안태훈 진사 집에서 만난 김형진(金亨鎭)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만주로 갔다.

 

행선지는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이르렀다. 선생은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를 만나 이에 합류하였다. 1895년 동짓달 초에 선생이 참가한 의병부대는 고산리(高山里)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실패한 선생은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1895년 명성왕후 살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나라에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를 다녀온 선생은 안악으로 되돌아오다가 한 사건과 마주쳤다. 18962월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만난 것이다. 이때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넉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國母)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결심하였다. 선생은 일본인이 숨기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과 함께 주소와 이름을 써 붙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인이 흔하지 않던 시절인데다가, ‘국모시해사건이 터진 직후였고, 게다가 칼을 숨기고 다니는 일본인을 바라보는 선생의 눈에는 그가 미우라이거나 그 패거리인 장교 또는 밀정으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보며 가슴 가득 원한을 가진 21세의 피 끓는 청년이 우연히 마주친 일본 흉한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뒤 석 달 지나(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 관원에게 붙잡힌 선생은 해주감옥에 갇혔다. 같은 해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옮겨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감시하는 일인 경관 와타나베(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와타나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이 심문을 개시하자, 선생은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아래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蒙白, 국상으로 흰갓을 쓰고 흰옷을 입음)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라 말했다. 그러자 감리사만이 아니라, 경무관과 청상에 있던 관원들이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 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높임말을 썼다. 이에 감옥 관리의 대우도 좋아지고 이를 들은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서양문물에 눈을 떴다.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을 익히면서,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의식도 갖추어 나갔다.

 

18977월 사형을 언도받고 동년 8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먼 뒷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법부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광무황제(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승지 가운데 한 사람이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발견하고, 재가가 끝난 서류를 광무황제에게 다시 보이면서 의견을 구했다. 이에 광무황제는 어전회의를 열어 논의한 끝에 사형집행을 정지시켰다. 이에 선생은 죽음 직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띄지 않았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더구나 그 명령이 전화로 통보되었는데, 서울에서 인천 감리서까지 전화가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석방될 날은 기약할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으려면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39일 밤 감옥을 탈출하였다. 선생은 호남지역을 돌아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고,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썼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경전을 배우고 외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 텃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누구도 선생을 신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민심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899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지냈다. 그 뒤 김창수(金昌洙)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자 한 글자로 쓰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지었다.

 

1904년에 최준례와 혼인한 무렵 선생은 본격적으로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뒤 갖가지 침략 조약을 강요하다가, 마침내 19051117, 정식체결 절차도 빠트린 2차 한일협약이란 것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이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조약 폐기를 촉구하는 상소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무너지는 나라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장기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길러 나라를 지키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바로 애국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출발점이었다.

 

선생은 황해도로 돌아가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 면학회(勉學會)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되어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서울 양기탁 집에서 열린 신민회(新民會) 모임에 참석하였다. 논의한 끝에 두 가지 대응방법을 정했다. 하나는 도독부와 각도 총감을 두어 행정을 장악하여 나라의 맥을 이어가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워 인재를 기르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를 맡을 지역별 대표를 선정하였으니,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그리고 황해도에 선생이 선임되었다. 대표들은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악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15일 일제는 신민회의 존재를 알아채고 회원들을 잡아들였다. 이에 따라 선생도 붙잡혀 서울에서 징역 2년 형으로 갇혀 지내는 동안, 또 다시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더해져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가출옥이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자를 딴 것이다.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도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해야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선생의 의지가 여기에 담겼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던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고,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불러들였다.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니, 국가와 정부, 그리고 의회를 세우는 일을 논의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생은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단동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4일 만에(1919. 4. 13) 상하이 푸동(浦東)나루에 도착하였다. 이 날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이틀 뒤였다.

 

선생은 신익희·윤현진·서병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이 되었다. 5월에 안창호가 상하이에 도착하여 내무총장이 되자, 선생은 임시정부의 파수를 맡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국무회의에서 그의 나이를 헤아려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내무총장 아래에서 경찰업무를 맡았는데, 특히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며, 정부 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전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한 신한청년당에도 가입하였다. 그러면서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버틸 수 있는 바탕인 동포사회의 조직인 대한인거류민단의 의원을 역임했다.

 

1922년이 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차츰 쇠락해졌다. 임시정부가 원격으로 국내 행정을 운영하던 연통부와 교통국 존재를 일제가 알아챈 것이 가장 주된 이유였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논의하다가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籌備會)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사용 문제로 다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선생은 안창호·김덕진·신익희·차리석 등과 1922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위기를 이겨내려고 노력하였다.

 

192210월 선생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는 데 앞장서 이사장을 맡았다. 파리강화회의 결과, 독립을 이룰 수 있는 전쟁기회가 눈앞에서 멀어지자, 시간을 갖고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계획이 나왔다. 이에 선생이 선택한 길이 한국노병회 창설이었다. 이것은 10년을 내다보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인 1만 명과 전쟁비용 100만원을 모으자는 계획이었다. 노병이란 말은 한 사람이 군사훈련을 받아 군인으로 양성된 뒤, 노동자로 스스로 자립하며 지내다가, 독립전쟁을 일으킬 때 참가하도록 준비한다는 전략이 담겼다.

 

19231월부터 5월 사이에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나라 안팎에서 지역과 단체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13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독립운동의 방향 정립을 논의하는 대규모 회의가 반년 가까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독립운동사에서 최대 규모이자 가장 오래 열린 회의였다. 여기에서 임시정부를 고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는 창조파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회의가 결렬되자, 내무총장을 맡고 선생은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해산령을 내렸다. 이것은 흔들리던 임시정부의 존재를 확고하게 잡아나간 일이었다.

 

1924년 의회인 임시의정원은 미국에 머물려 원격으로 통치하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그 뒤를 이어 2대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은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물러났고,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이 뽑혔다. 그 뒤를 홍진이 이었다가, 19261214일 마침내 선생이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비록 망명정부이지만 그 대표가 된 것이다.

 

선생은 곧 헌법 개정에 나섰다. 국무령으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기보다는, 국무위원들이 권력을 함께 가지면서 공동책임을 지는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고치고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1926년부터 임시정부 주변에서 좌우세력이 하나의 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이끌어가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을 넘으면서 좌우합작이 추진될 때에도 선생은 극심한 자금난을 견디면서 임시정부를 고수하였다. 임시정부만이 아니라 19298월에는 교민단장이 되어 동포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후 좌우합작이 결렬되자, 우파세력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하나뿐인 여당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이동녕·안창호·송병조·차이석·조완구·조소앙·엄항섭 등 주력 인물들이 대부분 참가하였다.

 

한편 선생은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를 구해낼 방법을 찾았다. 특히 일제가 만주에서 만보산 사건을 조작하여 한중 양국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바람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은 큰 위기를 맞고 있던 터였다. 이를 뒤집을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곧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이었다.

 

의열투쟁은 소수의 인력으로 적 요인 처단과 적 기관 파괴를 도모하는 특무공작이다. 이것은 불특정한 다수를 공격하는 테러와 견주어보면, 이는 오로지 침략 책임자와 통치기관만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투쟁이다. 전쟁을 벌일 만큼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의열투쟁이었다.

 

1931년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재무장을 맡고 있던 선생에게 권한을 맡겼다. 1932년 선생은 구체적으로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 세 개 팀을 보냈다. 1월에 이봉창 의사가 도쿄 일본왕궁 입구에서 일황에게 폭탄을 던졌고, 4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비롯한 침략군 최고 지휘관 일행에게 치명상을 입혀, 시라카와는 525일 사망하였다.

 

이때부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라져 중국 전역에서 모금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한 번도 공식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돕지 않았던 중국정부가 한 순간에 협조적인 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윤봉길의거 직후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을 돕던 미국인 피치(George Ashmore Fitch)의 집에 숨어 있다가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쟈싱(嘉興)의 추푸청(楮輔成) 집으로 몸을 피했다. 1933년 선생은 장제스의 요청을 받고, 안공근·엄항섭과 함께 난징 중국중앙군관학교 안에 있던 공관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세 가지를 약속하였다. 첫째,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할 것, 둘째로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셋째로 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이었다. 이에 따라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었다. 여기에 필요한 교관으로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이범석·오광선 등을 초빙하여 장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1935년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하면서 운영되던 임시정부는 갖가지 문제로 난관에 부딪쳤다. 하나는 좌우합작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이 만들어지고, 19357월 의열단과 한국독립당 등 여러 정당이 조선민족혁명당을 만들어 통합하면서 임시정부는 텅빈 상태가 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소수 인력만 남아 임시정부를 지키는 바람에 국무위원회 구성마저 어렵게 되었다. 이를 이겨내려고 선생은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었다.

 

193511월 선생을 비롯하여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6인이 논의한 끝에 다시 국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선생이 앞장서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난징 가까운 전장(鎭江)으로 옮겼고,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은 난징성 안에 비밀리에 머물며 한국독립군특무대를 운영하면서 청년장교를 길러냈다. 그러다가 193712월 난징이 무너지기 직전에 임시정부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급히 옮겨갔다.

 

19385월 창사 난무청(南木廳)에서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우파 3당이 통일회의를 열고 있을 때, 이를 시기하던 세력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이 사망하고, 선생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치료가 이루어져, 선생은 한 달 만에 기적같이 일어났다.

 

939년 창사조차 일본군 침공 아래 위험해지자,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가족들은 바다가 가까워 고국과 연결 가능성이 높은 광저우(廣州)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갑자기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류저우(柳州)로 옮기고, 다시 1939년 충칭(重慶) 아래 치장(綦江)으로 이동하였다. 겨우 숨을 돌린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도착하였다. 그러는 동안 전시체제를 갖추고, 헌법을 고쳐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바꾸고, 선생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한 1940년에 당··군 기본 틀을 완비하였다. 우파 3당을 묶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확충하며,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선생이 당의 집행위원장,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광복군의 통수권자가 되어 이를 이끌었다. 그런 바탕 위에 일본군의 진주만기습 소식을 듣자마자 19411210일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중국정부는 194111월 한국광복군을 지원하는 대신에 중국군사위원회로 하여금 행정과 작전권을 손아귀에 쥐도록 만들었다.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韓國光復軍9行動準繩)이 그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간섭과 제재를 풀려고 노력하였고, 1945년 초에 가서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한편 194312월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 보장 내용이 담겼다. 여기에는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앞서 그해 726일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5명이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아달라고 강력하게 부탁하였다. 그러한 노력이 카이로 선언에 한국문제를 담어 내게 만들었다.

 

19444월 개헌으로 주석·부주석제가 채택되었다. 좌우합작 체제를 갖추어 선생이 주석, 민족혁명당 대표 몫으로 김규식이 부주석을 맡았다. 또한 쿤밍(昆明)에 있던 미군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CIA 전신) 중국전구사령부와 한미군사합작을 이끌어 내어, 광복군을 국내로 진입시키는 국내정진작전(國內挺進作戰)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455월부터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OSS훈련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길러진 광복군 국내정진대가 투입되기 바로 전날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였다.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내 승인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환국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귀국날짜는 많이 늦어져 광복이 되고도 석 달이 더 지난 1123일에서야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하였다. 국민들은 독립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는 뜻을 담아 개선환영회를 열었다.

 

환국한 뒤 선생은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활동하였다. 하나는 열강의 신탁통치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이미 충칭시절부터 추진했던 정책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은 임시정부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길을 추진하였다. 19462월 비상국무회의 부총재가 되고, 이것이 국민의회로 개편될 때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직접 행정을 장악하려 했지만 미군정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셋째로 선생은 분단을 반대하면서 통일국가를 추진하였다. 남북한이 각각의 국가와 정부를 만드는 단계에 이르자, 마지막으로 남북협상을 선택하여 1948419일 평양으로 가서 대표자회의를 가졌다. 하지만 끝내 남북은 분단되고 말았다.

 

오로지 통일국가를 염원하던 선생은 19496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반대파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고 말았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선생은 의병에서 시작하여 애국계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으로 독립운동 50년 역사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동학, 유학, 기독교 등으로 종교를 섭렵했지만, 최고 가치는 민족에 두고, 통합·통일운동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시절 좌우합작을 일구어냈고, 환국한 뒤에는 통일국가 수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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