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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김법린(金法麟)선생
관리자
조회수 : 2149   |   2012-06-01


국가보훈처는 광복회ㆍ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ㆍ1운동 때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여 피압박민족대회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비밀결사 만당 일본지부를 조직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법린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범어사로 승적을 옮겨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다.

 1917년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밀령에 의하여 한국독립을 위한 사료의 집성과 전달을 주도하고,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의용승군을 조직하고 조직체가동을 위해 국내를 오가며 기밀부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져오자 선생은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하였고, 넓은 안목에서 조국 독립을 모색하고자 유학을 결심하고 1923년 11월, 프랑스 파리대학교(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같은해 12월,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서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28년 초, 불교계의 요청으로 귀국한 선생은 강연 및 기고 활동은 물론 조선불교청년회 재건,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 개최를 주도하여 일제 사찰령을 부정하는 등 불교계의 자주화를 위해 힘썼고, 학문적 정진을 위하여 일본 유학을 단행하였다. 이즈음 국내 불교청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이 결성되자, 선생은 만당 일본지부를 결성하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2년 3월 귀국 후 교육을 통한 민족자각에 힘쓰던 선생은, 1938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이 노출되어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되었으며, 범어사로 돌아와 강의를 계속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 1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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