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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문석봉 선생
관리자
조회수 : 2003   |   2011-11-01


11월의 독립운동가 문석봉(文錫鳳)선생 ◈ 을미의병의 초석이 된 유성의병장 ◈ (1851. 12. 24 ∼ 1896. 11. 19)

 

국가보훈처는 광복회ㆍ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을미사변 후 유성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 체포되었으며 탈옥하여 재거의를 도모하던 중 서거한 문석봉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1년 경북 현풍군(현, 경북 달성군 현풍면 상동리)에서 부친 하규와 경주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1882년 조운리(漕運吏)가 되었다. 첫 관리생활을 시작한 후 세곡을 조운선으로 운반하던 중 전라도지역의 기근 상태를 보고 기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893년 5월 선생은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복궁5위장에 특제되었으며, 그해 12월 진잠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11월 양호소모사의 직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나 의병을 일으켜 ‘토왜’하려 한다는 고발로 인해 공주부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양호소모사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무자비함과 조선정부의 나약함을 본 후 일본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공주부 관병에게 군사훈련을 시킨 것이다.

사실상, 의병투쟁의 계획 준비단계였다. 1895년 6월, 석방된 선생은 8월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고 국모의 복수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흉적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송근수, 신응조 등 지역유림의 대표자들과 함께 창의하여, 9월 18일 ‘공주의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지역의 유학자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동참 등 향촌사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선생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각지 통문을 발송하여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사직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고 공격의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았다.

공주관아를 선점하여 무기의 열세를 ‘지리의 이점’으로 메우고자 한 것이다.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무장하여 10월 28일,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공격에 패산하였다. 선생은 패산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하였으나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선생은 이듬해 봄 영장 최은동 등과 함께 파옥하고 탈출하였다. 옥고를 치르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봉기를 시도하는 등 선생의 의병투쟁에 대한 의지는 뜨거웠다.

같은 해 4월 선생은 서울에 들어와 정계의 요로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이어 원주로 내려가 ‘도지휘’가 되어 각도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시기 유인석의 제천의병과도 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 선생은 병에 걸려 8월 12일 현풍으로 귀환하였으며, 결국 11월 19일 밤에 46세의 일기로 병사하고 말아 거의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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