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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독립운동가 이범진 선생
관리자
조회수 : 2109   |   2011-07-30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제국 시기 주러시아 공사로서 을사늑약에 항거하고 헤이그특사를 후원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 경술국치 후 자결 순국한 이범진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1879년 문과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고, 1896년 주미공사가 되었으며, 1899년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오스트리아·프랑스까지 3개국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공사로 있던 시절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租借) 요구에 강경하게 반대하고 이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기도 하는 등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구국외교에 헌신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늑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선생은 이에 불응하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대한제국 특사 파견과 활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이상설과 이준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평화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작성하고, 또 아들 이위종을 사행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케 하였으며 특사들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각국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 특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마련하는 등 헤이그특사의 활동을 위해 모든 지원을 다하였다.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편성할 때,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군자금 1만루불을 제공하는 등 일제의 침략에 적극적인 저항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1910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선생은 유산을 미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하고, 1911년 1월 조국을 병탄한 일제에 항거하여 이역만리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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