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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김도연(金度演)선생 선정
관리자
조회수 : 1868   |   2009-01-29


 

◈ 동경 2·8독립선언 청년대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19년 일본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식에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여 9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는 초대 재무장관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 2·8독립선언 9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도 김포(현 강서구 염창동)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7세 때부터 한학을 익히고, 우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太極學校)에 입학해 근대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이후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 3학년에 입학한 선생은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졸업 이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들어가 일본 유학생의 중추 조직이었던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서 학우회의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YMCA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동경유학생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동경시내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여, 약 2개월에 걸쳐 준비한 끝에 1919년 2월 8일 조선YMCA회관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의 명칭을 ‘동경유학생 임시총회’로 하기로 하고 집회를 가졌다.

선생은 결의문을 낭독한 후 동경시내 만세시위를 진행하려 하였으나 일경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2·8독립선언 이후 선생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192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콜롬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아메리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은 미주지역 민족운동 세력 결집을 위해 ‘삼일신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식민지 교육의 한계를 느끼고, 실업계에 투신하여 조선제사회사(朝鮮製絲會社)의 감사역으로 활동하다 자본금 30만원의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업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국내에서의 반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선생도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경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어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보냈다.

 8·15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주역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초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하는 등 조국의 장래와 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1967년 7월 19일 아침 7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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