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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 박동완(朴東完)선생 선정
관리자
조회수 : 2147   |   2008-11-30


 

◈ 기독교계 3·1운동 민족대표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기독교계 민족대표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에는 미주지역에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평생을 바치신 박동완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5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박형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 환경 속에서 다섯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0대 후반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서는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 영어를 전공하였고,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선생이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 무렵 선생은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 및 조선중앙YMCA 위원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의 권유로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선생은 2월 27일 낮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기독신보》,《신생명》등 기독교계 언론을 통해 언론 계몽활동에 매진하였으며, 1925년 4월《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면서 정치적인 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고 1927년 1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활동하였다.

1927년 12월 9일,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백만 재만동포들이 중국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당하며 박해 받는 일이 벌어지자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이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하였는데, 선생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 1월 이도원과 함께 만주의 봉천성(현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1928년 중반 선생은 미주 오아후 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약 12년간 목회를 하였고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렇게 만리타향에서 민중의 목자로 활동하던 선생은 1941년초 병을 얻어 그해 2월 23일 이국 땅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의 유해는 한 달 뒤 국내로 돌아와 3·1운동 당시 고락을 함께 했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도 현재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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