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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순애·김규식선생
관리자
조회수 : 100   |   2019-04-30


김순애 선생

 

생몰연도 : 1889 ~ 1976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1977)

 

공적개요

 

- 1919년 상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 1919년 상해 대한적십자회 참여

-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참여

- 1934년 한국애국부인회 주석

 

공적상세

 

김순애의 출생과 유년시절

 

선생은 1889512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산이다. 선생의 집안은 서울의 양반명문가였지만 낙향하여 만석꾼의 대지주가 되어 김 참판댁으로 불렸다. 이곳에 서양선교사와 연을 맺은 서상륜형제가 피신해 온 뒤로 서상륜형제들이 지역에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특히 큰오빠 김윤방(金允邦)은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전 집안을 개신교로 개종시켰고, 나아가 마을에 소래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근대화에 앞장섰다. 집안의 아들, 딸 막론하고 신식 교육을 받게 하였던 바, 선생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향의 소래학교에서 교육은 후 상경한 오빠 김필순(金弼順)을 따라 1901년 어머니와 동생들과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를 다니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애국지사와 친분관계를 맺고 자기 집을 구국운동을 위한 장소로 제공하였다. 오빠들의 우국 충정한 사회활동은 선생으로 하여금 민족과 나라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구적인 오빠들의 활동으로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다수를 배출한 집안이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일제시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던 김마리아는 큰오빠의 딸이며, 둘째오빠 김윤오(金允五)는 구국계몽운동단체 서우학회 발기인이었고, 셋째오빠 김필순(金弼淳)은 신민회원으로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 만주 통화와 내몽고 치치하얼에서 독립운동자금과 토지를 제공했던 애국지사다.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여동생 김필례, 등이 그의 가족이었다. 그 외에 선생의 남편 김규식, 언니 김구례(金求禮)의 남편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선생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정신여학교에서의 실력 양성

 

선생은 상경한 후에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학교였지만 민족 교육에도 중점을 두어 한국여성교육의 배움터가 되었다. 특히 한국역사를 배우면서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민족의식을 키울 수 있었고, 한국여성을 깨우칠 자기의 책임도 깨달았다.

 

정신여학교는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학비는 무료였다. 선생 외 동생 김필례, 조카 김함라, 김마리아 등 한집안 여성들이 모두 이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김필순은 자기 집안 여인들이 무료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면 외국의 동정을 받는 것이니, 민족의 긍지에 허물이 된다고 판단하고 모두의 학비를 지불하였다. 오빠의 남다른 생각은 김순애는 물론 집안 여인들의 민족의식과 시대관을 확립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선생은 1909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草梁小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의 구국교육활동이 발각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세브란스의사였던 김필순은 신민회(新民會)의 일원으로 활동한 탓에 일제총독부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검거당할 위기에 처하자 1911년 중국 서간도 퉁화 현[通化縣]으로 피신하였고, 선생은 오빠의 권유로 19126월 어머니와 오빠네 가족들을 데리고 통화로 망명하였다.

 

망명지 남경에서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

 

이후 선생은 19159월 만주 통화현에서 남경(南京)으로 옮겨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1월 김규식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김규식은 선생의 오빠인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또 같은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다. 선생은 남경에서 간단한 혼인서약과 사진 한 장으로 조촐히 결혼식을 치른 후 남편 김규식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긴 신한청년당의 부름에 응하여 급히 상해로 이주한 것이다. 상해로 이주한 선생은 남편과 함께 1918년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丙浩김철(金澈조소앙(趙素昻조동호(趙東祜)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고 이사(理事)로 활동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1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선전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만주노령과 국내에는 강화회의에 한국대표 파견사실을 전하고, 동조를 위해 각 지역 시위투쟁을 전개하도록 촉구할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국내와 만주에서 일시에 거족적인 민족봉기를 일으켜 우리 민족 전체가 진정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하며 민족독립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써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의 한국 문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한국대표의 독립 외교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민족대립을 달성하려는 구상의 실현이었다.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에서는 미국의 로녹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하여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선정한 것이다. 신한청년당 당원이 된 김규식은 1919년 파리로 출발하였다. 곧바로 신한청년당은 파리 한국대표파견을 위한 지원과 그 후원을 위한 독립운동 촉구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에 따라 선생은 선우혁·김철·서병호와 국내로,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로, 조소앙·장덕수(張德秀)를 일본 동경으로 각각 파견되어, 국내는 물론 해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내로 밀파된 선생은 19192월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후 부산에서 백신영(白信永), 대구에서 김마리아, 서울에서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한국대표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소식을 전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런데 당시 선생은 3·1운동을 추진하는데 깊숙히 관여하고 있던 함태영으로부터 이미 국내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선생은 국내의 3·1운동에 동참하려 하였으나, 함태영이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에 밀려 3.1만세운동에 동참하지 못하고 228일에 국내를 떠났다.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전개

 

19192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고 평양(平壤)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선생은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활동 중이던 김필순을 찾아 갔다. 여기서도 선생은 한인동포들을 규합하여 국내의 3·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 추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일본영사관에 감금되기도 하였지만, 중국 관원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로 다시 귀환한 선생은 19197월 이화숙(李華淑이선실(李善實강천복(姜千福박인선(朴仁善오의순(吳義順)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선생이 회장으로 주도한 대한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 등 정신여학교 출신 인사들이 비밀리에 서울에서 결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평양(平壤)에서 김경희(金敬喜) 등이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등 국내외의 애국부인회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이들 단체들과 연락·협력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독립운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고, 해외 각지에 한국지도와 태극기 등을 제작하여 보급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독립전쟁을 대비하여 간호원 양성

 

이와 함께 713일 이희경(李喜儆안창호(安昌浩안정근(安定根) 등의 발의로 8월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戰傷兵)의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상해에서 재건되자, 선생은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대한적십자회의 사검(査檢이사(理事) 등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그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비밀리에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여 상호 연락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소위 간도출병(間島出兵)’ 이후 일본군이 저지른 재만 한인동포에 대한 학살 만행을 세계 각국의 적십자회에 알려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폄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혀 갔다. 이밖에도 대한적십자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적십자총회에 이관용(李灌鎔)을 대표로 파견하여 창립 보고와 함께 참가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저지하는 일본 정부와 일본적십자회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그 내용을 국제적십자총회의 기관지에 게재하는 등 대한적십자회의 독립적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대한적십자회의 활동 뒤에는 항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의 노력이 배어 있었다.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 전개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으면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하는 취지 아래 1920년 상해의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을 중심으로 해외 한인교육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이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여운홍(呂運弘)이 교장으로 있던 상해 한인동포 자제의 민족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유지비를 지원하고, 교사 신축비를 모금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달 30일 열린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총회에서 선생이 18인 의원 가운데 한 분으로 뽑힌 것도, 거류민 아동의 민족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 기초를 확립한 공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선생은 임시정부의 지지·후원활동과 함께 교민 보호와 아동교육의 일까지 맡게 되었다.

 

이후 파리강화회의·국제연맹회의·태평양회의 등 잇따른 국제회의에서의 외교 독립운동의 실패로 침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념과 방략상의 갈등으로 핵심 요인들이 탈퇴하여 축소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확대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리게 되었다. 선생 또한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그 최고 통할 지도기관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더니,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그 독립운동은 더욱 위축되어 갔다.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이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들의 옷세탁은 물론, 삯바느질도 하고, 하숙도 치고, 와이셔츠 공장도 경영하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은 물론 임시정부의 명맥을 지키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이 시기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선생은 19267월 안창호·송병조(宋秉祚김보연(金甫淵조상섭(趙尙燮박창세(朴昌世엄항섭(嚴恒燮) 등이 조직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벌여 갔다. 19308월 선생은 상해에서 김윤경(金允經박영봉(朴英峰연충효(延忠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산하의 여성 독립운동단체로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3·1운동 기념일에는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은 19324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투탄 의거로 일제의 추적이 심화되자,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 1932)·진강(鎭江, 1935)·장사(長沙, 1937)·광동(廣東, 1938)·유주(柳州, 1938)·기강(1939) 등지로 이동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19409월 중국 국민당의 후원으로 중경(重慶)에 안착하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나서자 독립운동단체들도 주의와 정파를 초월하여 본격적으로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이같은 분위기는 여성운동계를 재결집하여 민족통일전선에 나서게 하였다. 1943223일 선생은 충칭의 각계 각파 부인 50여명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재출범시켰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어 한국애국부인회재건선언과 7개항의 강령을 발표하였다.

 

강령에서 구국을 위해 여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그 핵심은 국내외의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되 남녀간에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국제적 부녀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세계 여성과 전인류의 영원한 화평 행복을 위한 공동 분투를 하자.”였다.

 

이어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선생은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김운택·연미당·강영파·권기옥·정정화 등이 각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아울러 연합군측으로부터 인계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재중자유한인대회 선언문 발표

 

1942년 여름부터 2차 대전 후 미국의 대외정책 중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한다는 구상으로 결정된 후, 19433월 워싱톤에서 영국 외상 이든과 미국대통령 루스벨트가 만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을 국제신탁통치 아래 둘 것을 합의하였다는 소식이 중경의 신문을 통해 전해졌다. 이에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이 즉각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1943510일 한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한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무정부주의연맹(無政府主義聯盟한국청년회(韓國靑年會) 등은 공동으로 재중자유한인대회(在中自由韓人大會)를 개최한 것이다. 이때 선생은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한국독립당의 홍진(洪震조선민족혁명당의 김충광(金忠光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金奎光무정부주의연맹의 유월파(柳月波한국청년회의 한지성(韓志成)과 함께 주석단의 일원으로 추대되어 이 대회를 주도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자유한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 우리는 우리 민족의 영구한 생존발전과 전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기 위하여 우리 국가의 완전독립을 주장한다.

 

2. 전후 한국을 국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요구에 위배되며, 또 동맹국의 대()일본 작전방침에 해로우며, 또 루즈벨트·처칠 선언의 기본정신에도 배치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바이다.

 

3. 우리는 동맹국의 승리와 일구(日寇)의 멸망을 확실히 믿음으로 단결하고 노력하여 일본을 반대하는 대혁명을 일으키려 한다.

 

4. 동맹 각국들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물자를 원조하고 우선 임시정부의 국제적 합법적 지위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

 

라고 하는 각 동맹국 영수들에게 보내는 전문을 성안 발송하여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을 요구하면서 우선적으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前途)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라고 하는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채택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 일치단결하여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한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우리 민족의 완전 독립과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여러 차례 절규하였는데, 이는 광복 이후의 외세 개입과 정치적 혼돈을 우려한 매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지적이고 주장이었다.

 

8·15 광복 이후 선생은 194511월 임정요인 1차 환국 때, 김구·김규식·이시영(李始榮김상덕(金尙德엄항섭·유동열(柳東說) 등과 같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이후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선생은 1976517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규식 선생

 

생몰연도 : 1881 ~ 1950

 

훈격 : 건국훈장 독립장 (1989)

 

공적개요

 

-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임시정부 외무총장

- 1932~ 193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 1944년 임시정부 부주석

 

공적상세

 

김규식의 출생과 유년시절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1881년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우사(尤史죽적(竹笛만호(晩湖서호(西湖) 등이며 중국에서 활동할 때 김성(金成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 또는 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한재강(韓再剛한중서(韓中書) 등 많은 가명을 사용하였다. 특히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중국으로 귀화해 여권을 발급받을 때에 귀화명은 김중문(金仲文)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했을 당시에는 박경(Pak Kieng)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아버지 김지성은 외부(外部) 관리가 되어 일본과 러시아 등지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개항장인 부산포를 관장했던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할 때 우사는 동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본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다.

 

부산 개항장을 관할하던 동래부에서 무역 업무를 담당한 아버지는 1884년에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늘어나자 불평등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이것이 발단이 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4살이었던 우사는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 생활하게 되었으나 2년 후에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6살의 어린나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우사는 서울의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다. 하지만 큰아버지 역시 형편이 어려워 우사를 맡아 기를 여력이 없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가 정동에 설립한 고아학교에 맡겨졌다. 우사의 세례명은 요한(Johann)이다. 언더우드 부인 홀튼 릴리어스(Lillias S. Horton)는 총명한 어린 우사를 양자로 삼고 돌보았다. 어느 날 우사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언더우드부부는 친히 약과 우유를 주며 극진히 간호하는 등 사랑을 주었지만 우사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우사는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언더우드 부부는 우사의 별명을 '번개비'라고 불렀다. 아버지를 상봉하게 된 우사는 망설임 없이 아버지와 함께 고향 홍천으로 내려갔지만 1891년 여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데 이어 1892년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1894년 가을에는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과 큰형 규찬(奎贊)마저 죽음을 맞이하였다. 우사는 13살 어린 나이에 그야말로 천애 고아가 되었다. 18943월에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1기생으로 입학하여 제1반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우사는 생계 때문에 식품점에서 영업 점원으로 일하였다.

 

청년시절과 미국 유학

 

독립협회에 가입한 우사는 독립신문사에 입사해 영어사무원 겸 회계, 그리고 취재기자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재필이 유능한 한국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유학해 선진학문을 공부할 것을 권유하자 우사는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1897년에 9월에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통의 인문대학인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하고 1898년 가을에 정식으로 본과에 입학하였다. 우사가 재학했을 당시 로아노크 대학에는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을 비롯해 여러 한국 젊은이들도 수학 중이었다. 우사는로아노크 대학생(Roanoke Collegin)이라는 학교잡지 19005월호에한국과 한국어(Korean and Korean Language)라는 글을 기고해 한글의 계통, 음운 및 문법 구조의 특성을 역사비교언어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한글을 우수성을 알렸고 19022월호에는동방의 아침(The Dawn in the East)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였다. 우사는 19006월 학내 강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웅변토론클럽인 데모스테니언문학회(Demosthenean Literary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015월에 개최된 강연대회에서는인류문화의 비밀-낙관주의라는 연제로 강연, 2등을 수상하였으며 동 문학회의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우사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 어학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035월호에 기고한 글인러시아와 한국문제(Russia and the Korean Question)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글이지만 이미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재학 중에 92.2점의 평점을 유지하였고 전체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6년 만인 19036월에 로아노크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해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1년 만에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 과정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 지원 제안을 받았으나 19042월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우사는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있으면서 그 해 가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1905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되는 러?일간의 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 문제를 변론하고자 미국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上海)까지 갔으나 여의치 못해 117일 도로 귀국하고 말았고 10일 후인 1117일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강탈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우사는 상동청년회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고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이 되어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흥화학교, 광화신숙, 상업전문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영어과 강사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521일에 과거 군수였던 조순환(趙淳煥)의 딸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와 새문안교회에서 결혼하였다. 그녀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고 새문안교회 교인이었다. 1907년에 장남 진필(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사망하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우사는 1913년까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학관의 교사 겸 학감,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새문안교회 건축위원회 위원이 되어 교회건축을 추진하고 1910529일에 헌당식을 거행할 때, 교인을 대표해 봉헌사를 낭독하였다. 1910829일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가운데 191010월에 새문안교회의 두 번째 장로로 장립되었고 YMCA 학생부 담당 간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1112월 경기·충청도 장로교연합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는 등 우사는 종교와 교육 분야에서 활동무대를 넓혀나갔다. 19119월 조선총독부가‘105인사건을 일으키고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했을 때, 우사는 투옥은 모면했으나 그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해졌다. 그러는 가운데 1912년 차남 진동(鎭東)이 출생하였고 동년 2월에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김규식의 출생과 유년시절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1881년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호는 우사(尤史죽적(竹笛만호(晩湖서호(西湖) 등이며 중국에서 활동할 때 김성(金成김중문(金仲文김일민(金一民), 또는 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한재강(韓再剛한중서(韓中書) 등 많은 가명을 사용하였다. 특히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중국으로 귀화해 여권을 발급받을 때에 귀화명은 김중문(金仲文)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했을 당시에는 박경(Pak Kieng)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아버지 김지성은 외부(外部) 관리가 되어 일본과 러시아 등지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개항장인 부산포를 관장했던 동래부사의 부관으로 근무할 때 우사는 동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본적지는 강원도 홍천이다.

 

부산 개항장을 관할하던 동래부에서 무역 업무를 담당한 아버지는 1884년에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늘어나자 불평등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며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이것이 발단이 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4살이었던 우사는 어머니와 함께 상경해 생활하게 되었으나 2년 후에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6살의 어린나이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우사는 서울의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다. 하지만 큰아버지 역시 형편이 어려워 우사를 맡아 기를 여력이 없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가 정동에 설립한 고아학교에 맡겨졌다. 우사의 세례명은 요한(Johann)이다. 언더우드 부인 홀튼 릴리어스(Lillias S. Horton)는 총명한 어린 우사를 양자로 삼고 돌보았다. 어느 날 우사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언더우드부부는 친히 약과 우유를 주며 극진히 간호하는 등 사랑을 주었지만 우사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버지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우사는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다가 교인들에 의해 언더우드의 집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언더우드 부부는 우사의 별명을 '번개비'라고 불렀다. 아버지를 상봉하게 된 우사는 망설임 없이 아버지와 함께 고향 홍천으로 내려갔지만 1891년 여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데 이어 1892년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졌다. 1894년 가을에는 할아버지 김동선(金東璇)과 큰형 규찬(奎贊)마저 죽음을 맞이하였다. 우사는 13살 어린 나이에 그야말로 천애 고아가 되었다. 18943월에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1기생으로 입학하여 제1반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우사는 생계 때문에 식품점에서 영업 점원으로 일하였다.

 

청년시절과 미국 유학

 

독립협회에 가입한 우사는 독립신문사에 입사해 영어사무원 겸 회계, 그리고 취재기자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였다. 당시 서재필이 유능한 한국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유학해 선진학문을 공부할 것을 권유하자 우사는 언더우드의 후원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다. 1897년에 9월에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있는 루터교 계통의 인문대학인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 예과에 입학하고 1898년 가을에 정식으로 본과에 입학하였다. 우사가 재학했을 당시 로아노크 대학에는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을 비롯해 여러 한국 젊은이들도 수학 중이었다. 우사는로아노크 대학생(Roanoke Collegin)이라는 학교잡지 19005월호에한국과 한국어(Korean and Korean Language)라는 글을 기고해 한글의 계통, 음운 및 문법 구조의 특성을 역사비교언어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한글을 우수성을 알렸고 19022월호에는동방의 아침(The Dawn in the East)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였다. 우사는 19006월 학내 강연대회에서 1등을 하고 웅변토론클럽인 데모스테니언문학회(Demosthenean Literary Society)의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015월에 개최된 강연대회에서는인류문화의 비밀-낙관주의라는 연제로 강연, 2등을 수상하였으며 동 문학회의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우사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등 어학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035월호에 기고한 글인러시아와 한국문제(Russia and the Korean Question)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글이지만 이미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한국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머지않아 드리워질 침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재학 중에 92.2점의 평점을 유지하였고 전체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6년 만인 19036월에 로아노크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해 가을,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1년 만에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학위 과정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비 지원 제안을 받았으나 19042월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우사는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있으면서 그 해 가을,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YMCA) 교육부 간사에 임명되었다. 1905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되는 러?일간의 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 문제를 변론하고자 미국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上海)까지 갔으나 여의치 못해 117일 도로 귀국하고 말았고 10일 후인 1117일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 나라의 주권이 일제에 강탈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우사는 상동청년회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의 나갈 길을 의논하고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이 되어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흥화학교, 광화신숙, 상업전문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영어과 강사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521일에 과거 군수였던 조순환(趙淳煥)의 딸인 조은수(趙恩受, 당시 16)와 새문안교회에서 결혼하였다. 그녀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고 새문안교회 교인이었다. 1907년에 장남 진필(鎭弼)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사망하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우사는 1913년까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YMCA 이사회 이사 겸 서기를 거쳐 YMCA 학관의 교사 겸 학감, 경신학교 교사, 기독교 주일학교 교장, 배재전문학교 영어강사, 연희전문학교 영어강사, 조선기독교 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7회 세계기독학생연맹세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으며 새문안교회 건축위원회 위원이 되어 교회건축을 추진하고 1910529일에 헌당식을 거행할 때, 교인을 대표해 봉헌사를 낭독하였다. 1910829일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가운데 191010월에 새문안교회의 두 번째 장로로 장립되었고 YMCA 학생부 담당 간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1112월 경기·충청도 장로교연합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경신학교 교감에 선임되는 등 우사는 종교와 교육 분야에서 활동무대를 넓혀나갔다. 19119월 조선총독부가‘105인사건을 일으키고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 투옥했을 때, 우사는 투옥은 모면했으나 그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해졌다. 그러는 가운데 1912년 차남 진동(鎭東)이 출생하였고 동년 2월에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중국 망명과 독립운동 참여

 

1913년 봄,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우사에게 일본 도쿄 외국어대학교 영어교수직을 제안하고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 장학생으로 특별 입학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 그러나 우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망명을 준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학을 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1913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해 12월에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46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을에 군사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류동렬(柳東說), 이태준(李泰俊), 서왈보(徐曰輔) 등과 함께 외몽골 우르가(庫倫, 현 울란바토르)으로 건너갔다. 군관학교 설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자금조달이 쉽지 않자 직접 피혁 장사를 하기도 하고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러시아인들에게 개인교수를 하며 독립자금을 모았다. 한편 화북성(華北省)에서는 성경과 기독교 용품을, 상하이에서는 발동기계를 판매하는 등 2년간 화북과 몽골지방을 오가며 독립운동계 인물들과 접촉하였다. 또한 미국과 스칸디나비아계의 물산회사인 앤더슨 앤드 마이어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회계 겸 비서로 일하고 1916년에는 장자커우(张家口) 지점의 부지배인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기도 하였다.

 

아내 조은수가 둘째 아들 진동을 데리고 외몽골로 우사를 찾아와 가족이 함께 생활하기도 했으나 폐병에 걸린 아내와는 1917년 여름에 사별하고 말았다. 우사는 김성(金成)이라는 가명으로 19177월에 신규식·조소앙·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통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기도 하였다. 우사는 만주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19183월초 앤더슨앤드마이어 몽고 울란바토르 지점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한 바 있고 텐진(天津)에 미국계 회사인 피어온 다니엘 주식회사(Fearon Daniel Co, Inc.)의 수입부에서 중국 각지에 델코(Delkor) 전구 판매망을 구축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참여와 외교활동

 

191811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윌슨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lane)이 파리강화회의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하자 찰스 크레인을 면담한 여운형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파리강회회의에 한국대표단 파견을 결의하고 신한청년당은 1128일 우사를 파리 강화회의 한국대표단 수석대표로 임명하였다. 파리로 가기 전 우사는 19191월에 난징(南京)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결혼식을 올렸다. 우사는 15일 만에 중국인 여권을 발급받아 191921일 상하이를 출발해 313일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강회회의는 이미 118일부터 시작되었다. 대표단은 파리 9구 샤토당 거리(Rue de Chateaudun) 38번지의 사무실을 임대하여 파리한국통신부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외교부 측이 '회의 참석대상은 정부의 대표자 자격이어야만 참가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우사는 임시정부의 대표라는 신임장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상하이에서는 4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우사는 외무총장 겸 파리 현지 주재위원으로 임명되었기에 413일에 임시정부는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파리 강화회의에 전보로 발송하였다. 우사는 5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고 각국 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강들은 한국민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한 채 회의는 종료되었다. 86일 외국기자들과 파리주재 외교관들을 초빙해 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우사는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언급하며 한국인은 독립을 원한다고 연설하였다. 파리위원부 위원장직을 부위원장 이관용(李灌龍)에게 이관한 우사는 이승만의 초청을 받고 822일 미국 워싱턴디씨(DC)에 도착해 구미위원부의 초대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다가 19199월 통일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에 임명되었다. 9월말까지 미국 서부 각지를 순회하며 구미위원부와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하며 독립공채를 판매하여 3주 만에 약 52,000달러를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 우사는 두통으로 고생을 하다가 월터리드(Walter Reed)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와 창조파에 서다

 

1921118일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이동휘 국무총리 간에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차이로 갈등이 야기되자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학무총장 자리를 사임하고 남화학원(南華學院)을 설립해 교육에 전념하는 한편 4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하여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111월에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 축소문제와 극동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혹은 워싱턴 군축회의)가 열렸다. 임시정부는 여기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강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민족독립을 다시 한번 관철하고자 이승만을 전권대사, 서재필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임정이 태평양회의 대처 문제로 분주할 때, 소련으로부터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즉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한 태평양회의에 대응하여 약소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레닌 정부가, 같은 시기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우사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참가를 결정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기성촉성회 조직위원으로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준비 중에 192111월에 몽골의 고비사막을 횡단하여 러시아 이르크츠크에 도착하였다. 마침 자유시참변의 재판이 열리고 있던 중이어서 여운형과 함께 배심원의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였다. 당초 극동피압박민족대회는 일본의 참가로 대회이름을 극동인민대표회의로 고쳤고 당초 이르크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소련 당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모스크바로 대회 장소를 옮겼다. 이 바람에 한국 대표단도 시베리아열차편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였고 대회는 1922121일부터 크레믈린궁에서 개막되었다. 극동인민대표회의에는 총 144명의 각국 대표들이 참가하였고 한국대표는 가장 많은 수인 50여명이 참가하였다. 우사는 의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레닌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극동인민대표회의는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론과 정책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주어 종래 민족통일전선 정책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강령과 배치된다고 인식하던 데서 벗어나 민족혁명단체들과 제휴하여 민족통일전선 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19231월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장을 맡고 창조파 편에 섰던 우사는 5월에 한중호조사 창건 2주년 기념회에서 “3.1정신과 5.4운동정신을 발양해 민족자강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3년 모교 로아로크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이 해 큰딸 한애(韓愛)가 출생하였다. 창조파 일행은 830일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제3인터내셔널의 밀사를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교섭했으나 레닌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새로운 정부를 창조하고자 했던 여망은 성공하지 못했다. 19241월에 창조파들은 러시아에서 추방당해 우사도 5월에 만주를 경유해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 때 둘째딸 만애(晩愛), 이듬해 1925년에 셋째딸 우애(尤愛)가 출생하였다. 이 무렵 우사는 복단(復旦)대학·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는 한편, 중등 과정의 고등보습학원인 삼일중학을 세우고 운영하며 교육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천진 북양(北洋)대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1925123일자와 26일자동아일보지상에반성과 단결의 필요라는 논설을 발표하고 우사는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하였다. 또한 19272, 한국, 중국, 인도, 대만, 안남 등의 대표들이 난징(南京)에 모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한 자리에서 회장에 추대되었고 그 자리에서 피압박민족이 완전한 자주독립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동방의 각 피압박민족이 통일전선을 이루어 제국주의자에 항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 합의하였다. 동 연합회는 기관지동방민족을 중국어와 영어, 한국어로 매월 간행했다. 이 당시 우사는 우창(武昌)과 한커우(漢口)에서 북벌군에 합류해 류전화(劉振華) 부대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거쳐 통저우(通州)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19274월 상하이에서 민족해방운동 내부의 좌우익 세력을 통합하고자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했을 때, 우사는 집행위원이 되어 통일운동에 합류하였다. 그러다 192775일에연합(Union)지에 영국과 미국을 배척하는 기사를 투고했다가 텐진의 영국 조계 당국에서 체포 명령이 내려져 피신해야만 하였다. 19291월경, 좌우익계가 참여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좌익계열의 이탈로 결렬되고 별도의 유호(留滬)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자 우익세력은 19301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처럼 민족유일당 운동이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진영으로 분리되어버리자 우사는 그 어떤 편에도 서지 않고 북양대학(北洋大學)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이 해 차녀 만애가 사망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주도하다

 

1931918일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고 이어 19321월에 상하이를 침공해 들어오자 한중간에 통일전선운동 또한 활발하게 이어졌을 때 우사는 통일전선운동을 지도해 나갔다. 그러던 중 429일 윤봉길의거가 일어난 날 안창호가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으나 우사는 전선통일운동을 계속 진행해 마침내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발족시켰다. 우사는 19331월 중국국민당의 민간사절단 대표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미국전역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항일투쟁 자금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다. 우사가 다녀간 이후 미주에서는 한중민중대동맹 미주 지부가 결성되었다.

 

19343월에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인 우사와 송병조, 김두봉, 최동오, 윤기섭, 윤세주 등은 새로운 신당 조직의 필요를 선언하였다. 그것은 각 단체의 연합체적 성격상 결속력과 통제력이 미약한 동맹체제로서는 전선통일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므로 동맹을 해체하고 강력한 결속력과 통제력을 갖는 신당을 조직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대일전선통일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357월에 난징 금릉(金陵)대학 대례당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대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 등 5당 통합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민족혁명당 최고 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과 국민부 부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는 우사를 괴롭혔다.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자 당원으로서 신분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1936년 이후는 주로 사천성 사천(四川)대학의 외국문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193777일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중국 전역을 유린해가자 한국독립운동 세력 중 하나는 19378월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光復陣線)를 결성하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은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이 같은 양대 분립은 대일 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외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히 이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모두에 재정적·군사적 지원하였던 중국 국민당 정부는 양대 계열의 합동을 촉구하였다. 이들 양대 계열의 중심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5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통해 통합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어 1939827일부터 사천성 기강(綦江)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으나 이 회의는 통합 방식을 둘러싼 양측의 상반된 입장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194111월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참여를 선언하고 민족혁명당의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는 19427월에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중국 관내에서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정을 중심으로 연대와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우사 또한 충칭으로 와서 1942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동시에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421011일에 열린 한중문화협회 설립 대회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요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가 이사장으로 임명되었고 우사는 상무이사가 되었다. 이어 1025일에 열린 제34차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좌익계 인사 23명이 새로 의정원이 됨으로써 역사적인 좌우합작의 의정원을 이루었다. 19431월에 우사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222일에 열림 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4년 주석부주석제를 채택한 임정의 임시약헌 5차 개헌에 따라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해방과 통일임시정부 수립운동

 

19458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조국이 광복되자 김구 등과 함께 194511월 임시정부 요인 환국 제1진으로 32년 만에 귀국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76명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음을 깨닫고 입장을 수정해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섰다. 19462월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을 발족하고 부의장에 선임되었으며 이어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3월 민주의원 의장직을 겸임했다. 3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미소공위의 성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5월 좌우합작을 위한 첫 모임 이래 좌우합작운동에 나섰으며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개원하자 의장에 선출되어 좌우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472월 조선적십자사 창립대회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되었고 19471014개 정당과 개인이 참가해 조선민족자주연맹 결성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을 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11월 유엔총회에서 남북을 통한 총선거안이 결의되고 유엔 한국위원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북한은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경을 거부하자 남북지도자 회담을 적극 주선하며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482월 유엔 임시총회에서 선거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안이 가결되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참여에 반대하였다. 1948년 김구에 이어 4월 민족자주연맹 대표단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5월 서울로 귀경한 이후에 남한만의 선거에 불반대 불참가 원칙을 표명하였다. 19505월 보궐선거가 이루어지고 곧 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으나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9월에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평안북도 만포진까지 끌려간 우사는 그해 1210일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우사의 저서로는엘리자베드 시대의 연극입문(An 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a)(1938), 중국 근대 비극시완용사(婉容詞, Wan Yung Tze)의 영문번역(1943), 실용영문작법(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s(1944), 시집양자유경(揚子幽景, The Lure of the Yangtze)(1945), 상용영어(Chengtu English Weekly(1945) 등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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