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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밀양과 의열단
관리자
조회수 : 1600   |   2019-11-19


1920년 9월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26살 청년 박재혁, 1921년 9월 조선총독부를 폭탄으로 응징한 27살 청년 김익상, 1923년 1월 일제 탄압의 상징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1924년 1월 일본 왕궁을 향해 폭탄 의거를 시도한 김지섭,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에 나선 나석주. 모두 항일 비밀결사조직 의열단(義烈團) 단원들이다. 일제강점기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기존의 온건한 독립운동 대신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방식을 택했다. 폭력 투쟁. 단순히 소수의 식민지 권력자들을 처단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 민중의 자각을 촉발시켜 독립 혁명의 주체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그래서 ‘테러’가 아니라 ‘의열’이다. ‘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이다. 의열단은 23번의 폭탄 의거와 일본 고관 암살, 친일파 처단 등으로 일본의 혼을 빼놨다. 


의열단을 말할 때 경남 밀양과 약산 김원봉(1898~?)을 빼놓을 수 없다. 밀양은 역사적으로 진리를 향한 맹렬함과 의분, 결기가 서린 고장이다. 영남 유림의 일대종사라 할 김종직(1431~1492) 선생이 여기서 태어났다. 조선 유학의 정맥이라는 퇴계 이황이 존숭한 조광조가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로부터 나왔으니, 김종직은 우리 근세 유학의 조종(祖宗)이라 할 인물이다.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조의제문’으로 연산군 때 부관참시의 참화를 당하고 만다.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의 생애가 여기에 겹쳐진다. 그는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혹시나 이순신 같은 인물은 없는지 늘 걱정하던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이었다. 그를 붙잡으려고 내건 현상금이 당시 100만 원, 현재 가치로 320억 원이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것은 월북 탓이 크다. 해방 후 조국은 여전히 친일파 세상이고 늘 죽음의 위협 속에 놓여 있던 그에게 월북은 불가피했다. 김일성은 정권 초기 그를 크게 대접하더니 유일사상이 공고화하자 제거해 버렸다. 약산 김원봉은 그렇게 남과 북에서 모두 지워져 역사로부터 부관참시된 이름이다.

지난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정신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 밀양을 비롯한 경남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약산만큼 이념을 떠나 순결하게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도 없다. 그를 빼고는 항일 독립투쟁사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도 쓰기 힘들 것이다. 색안경을 벗고 이제 합당한 평가를 내려야 할 때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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