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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데일리]위대한 민족영웅 애국DNA 물려받은 현대판 독립운동가
관리자
조회수 : 2823   |   2019-03-06


▲ 독립운동가 김근수·전월선 선생의 장남인 김원웅(사진) 전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장은

3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국회 윤리특별위원장, 통일외교통상위원장 등을 역임한 김 전 회장은

아직까지도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잇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조선의열단 부모 둔 3선 의원, 율곡 이이 학풍 마지막 적통 후손 


[특별취재팀=이철규 부장|조성우·강주현 기자]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한 현재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친일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선열들의 뜻을 간직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도 속해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 시절, 수많은 독립 열사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서슬퍼런 총칼 앞에 섰다. 그들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이 마중물이 돼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일제의 망령을 지워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완전한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조선의열단 부모를 둔 3선 국회의원…“친일 잔재 뿌리 뽑아야”
 
김원웅(남·74) 전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이하·항단연) 회장은 14대·16대·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원로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현재는 강원도 인제에서 사회적협동조합 허준약초학교를 개설해 운영해오고 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당찬 발언과 민족주의적 행보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김 전 회장은 조선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근수·전월선 선생의 장남이다.
 
지난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김근수 선생은 일본에 나라가 뺏길 위험에 처하자 중국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열단에 합류한 김 선생은 연락원으로 활동했으며 1941년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합류해 선전 및 정보수집활동을 벌였다. 192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전월선 선생은 16세가 되던 해 중국 계림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입단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곳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 등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김 전 회장은 부모님에 대해 ‘강직하신 분들’이라고 정의했다.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한 인물들이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의 표정에는 훌륭한 부모님을 둔 자랑스러움과 자신도 부모님의 뜻을 이어받아 애국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결연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드셨어요. 아버님은 조선의열단에서 활동을 하셨고 어머니는 조선의용대에서 활동을 하셨죠. 이후에는 광복군에서 같이 활동을 하셨어요. 두 분 모두 생사를 오가는 치열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셨죠. 아버지는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죠.” 

 

▲ 김원웅(사진) 전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장은 우리나라 역사를 '항일 운동의 연속'이라고 표현했다.

 친일 잔재들을 청산하지 못한 독립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다. 김 전 회장은 역사바로잡기 등을

 전개하며 독립운동가의 역사를 알리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소통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김 전 회장은 부모님들의 결혼에 백범 김구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광복군에서 만난 두 사람을 김구 선생이 직접 결혼까지 주선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광복 직전 해인 1944년 김 전 회장을 낳았다.
 
“아버님은 북쪽에서, 어머님은 남쪽에서 주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아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이후에 광복군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백범 김구 선생님이 두 분의 결혼을 주선하셨죠. 그래서 1942년에 두 분이 결혼을 하셨고 저는 독립 직전 해인 1944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죠. 당시 광복군에서 애기가 태어나기 힘들었는데 제가 태어나면서 축제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해요. 저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어요.”
 
김 전 회장은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남성 독립운동가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겸손한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최근에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저희 어머님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어요. 실제로 지난해 국립대전현충원 8월의 독립운동가로 저희 어머님이 선정되기도 했죠. 그런데 어머님이 선정되신 것에 대해 의문이 생겼어요. 저희 어머님보다 더 오래 활동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문의를 했더니 여성 스스로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례는 굉장히 드물다는 답변을 받았고 그제야 어머님의 8월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이해하게 됐죠.”
 
김 전 회장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매우 아쉬워했다. 특히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그 후손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데 반해 오히려 친일파와 그의 자손들이 좋은 대우를 받으며 목에 힘을 주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췄다.
 
“어렸을 적 아버님이 독립운동가 동지의 장례식을 다녀오시고 펑펑 우셨어요. 당시에는 집에서 대부분 장례를 치뤘는데 절을 올릴 자리가 없어서 문턱에 이불을 깔고 절을 하셨다고 말씀 하셨죠. 특히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안에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다는 유언을 남기셨대요. 그래야 후손들이 잘 살수 있다면서 말이죠.”
 
“그런데 이런 대우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어요.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 각 종 독립행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해요. 단상 위에서 상 받는 사람들 중에 친일파 후손들이 있고 정작 상을 받아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단상 아래 있게 되기 때문이죠.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것 역시 다른 분야에 비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기사 중략)

조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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