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미디어붓다]외조부 피우정터 내준 恩惠,국립묘지 안장 도우며 報恩
관리자
조회수 : 2504   |   2013-12-02


민 회장, 운암선생 피우정 자리 내준 구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도와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두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보여준 세대를 넘은 보은행(報恩行)이, 살을 에는 칼바람이 매서운 초겨울을 포근하게 만드는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애국지사 고 구익균 선생의 딸 구혜란 씨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며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고 운암 김성숙 선생의 외손자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다.
민성진 회장은 지난 4월 타계한 구익균 선생이 억울하게 국립묘지 안장이 불허되자, 구익균 선생의 딸 혜란 씨를 도와 국립묘지 안장을 허락받는데 물심양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는 외할아버지인 운암 선생의 말년 거처였던 피우정을 지을 수 있도록 흔쾌히 땅을 내어준 구익균 선생에 대한 보은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구익균 선생은 한국과 중국 오가며 독립운동 벌인 애국지사

구익균 선생(오른쪽 사진)은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로 지난 4월 8일 오전 7시 50분 향년 105세로 별세했다. 1908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선생은 1928년 신의주 고보에 재학 중 잡지 "신우"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됐다. 이듬해 3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의주 학생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 한국유학생회 간부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33년 광둥의 중산대학에 근무하면서 한국독립당에 가입, 한국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했다.

193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선생이 별세한 후 장지로 발표됐던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안장이 발인 하루 전 돌연 국가보훈처의 안장 취소 통보로 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취소처분의 이유는 선생이 과거 조세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딸 구혜란 씨는 장례 준비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안장도 거부됐다고 통보를 받고 정말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 구혜란 씨를 힘겹게 한 것은 당시 보훈처가 ‘사회적 파장이 큰 범죄와 공공질서를 크게 저해하는 범죄를 엄격히 심의해 고인의 안장을 거부한다"는 글을 사이트에 올려 아버지를 흉악범처럼 묘사한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서 운암과 인연맺은 구익균 선생 억울한 사정에 내일처럼…


이 소식은 곧 항일독립운동가단체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민성진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에게 알려졌고, 이때부터 민 회장은 자기의 일처럼 구혜란 씨(오른쪽 사진)를 도왔다. 구혜란 씨는 민 회장 등의 도움과 조언을 받아 지난 5월 7일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중앙행심위)에 ‘보훈처의 안장 거부 처분 취소’ 행정심판을 청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 11월 26일 중앙행심위로부터 국가보훈처의 처분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안장거부 통보를 받은 지 7개월 만의 낭보였다.

특히 이런 노력 과정에서 구익균 선생의 사문서 위조 혐의는 채권단장으로 영세업자를 돕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군사정권의 정치적 의도로 조세 포탈 혐의도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게 입증돼 구익균 선생의 명예도 말끔이 회복됐다.


행정심판은 위법·부당한 행정처분 등으로 권리·이익을 침해받은 국민이 행정기관에 제기하는 권리구제 절차로, 행정기관은 중앙행심위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즉각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절차를 밟아야 한다. 보훈처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처분 취소 결정을 통보받으면 대전현충원 안장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성진 회장(왼쪽 사진)이 구혜란 씨를 도와 구익균 선생의 명예회복과 국립묘지 안장을 도운 것은 외할아버지인 운암 김성숙 선생이 말년에 갈 곳이 없어 애를 태울 때, 구익균 선생이 서울 구의동에 있는 자신 소유의 땅 10평을 흔쾌히 내주어 피우정(避雨停)을 지을 수 있게 해준 데 따른 보답에 다름아니었다.


구익균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며 중산, 상해 등지에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운암 김성숙 선생과 교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연이 바탕이 되어 운암 선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땅 일부를 떼어 여생을 지낼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운암 선생의 외손 민성진 회장은 외할아버지를 도와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항일독립 애국지사가 홀대를 받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구익균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의 당위성을 알리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항일독립운동가단체들이 이 일에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뒷받침 역할을 담당했다.

 

구씨의 7개월 노력 결실…시공 넘은 보은행 피우정 복원으로 꽃 필 듯


7개월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던 날, 민성진 회장은 이 기쁜 소식을 온 국민께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연합뉴스에 연락을 했고, 마침내 구익균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결정 소식이 딸 구혜란 씨와의 연합뉴스 인터뷰 기사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구익균 선생의 딸 구혜란 씨. 사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피우정이 있던 구의동 옛 자리에 피우정 복원을 기획하고 현재 광진구와 협의 중에 있어,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두 독립운동가 후손의 아름다운 인연은 머지않아 피우정 복원으로 만개할 전망이다.


항일독립 투쟁에 앞장섰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이어 손자와 딸로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민성진 회장과 구혜란 씨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각박해진 세상에 모처럼 훈훈한 온기를 전해주고 있다.

외조부 피우정터 내준 恩惠
국립묘지 안장 도우며 報恩

운암 김성숙 선생(태허스님)의 외손자 민성진 회장과
구익균 선생의 딸 구혜란 씨의 시공 넘어선 인연 ‘화제’

민 회장, 운암선생 피우정 자리 내준 구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도와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두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보여준 세대를 넘은 보은행(報恩行)이, 살을 에는 칼바람이 매서운 초겨울을 포근하게 만드는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애국지사 고 구익균 선생의 딸 구혜란 씨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며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고 운암 김성숙 선생의 외손자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다.
민성진 회장은 지난 4월 타계한 구익균 선생이 억울하게 국립묘지 안장이 불허되자, 구익균 선생의 딸 혜란 씨를 도와 국립묘지 안장을 허락받는데 물심양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는 외할아버지인 운암 선생의 말년 거처였던 피우정을 지을 수 있도록 흔쾌히 땅을 내어준 구익균 선생에 대한 보은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구익균 선생은 한국과 중국 오가며 독립운동 벌인 애국지사

구익균 선생(오른쪽 사진)은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로 지난 4월 8일 오전 7시 50분 향년 105세로 별세했다. 1908년 평북 용천에서 출생한 선생은 1928년 신의주 고보에 재학 중 잡지 "신우"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됐다. 이듬해 3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의주 학생 의거를 일으켰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 한국유학생회 간부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33년 광둥의 중산대학에 근무하면서 한국독립당에 가입, 한국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했다.

1935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선생이 별세한 후 장지로 발표됐던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안장이 발인 하루 전 돌연 국가보훈처의 안장 취소 통보로 무산되는 일이 벌어졌다. 취소처분의 이유는 선생이 과거 조세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유족들은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딸 구혜란 씨는 장례 준비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안장도 거부됐다고 통보를 받고 정말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 구혜란 씨를 힘겹게 한 것은 당시 보훈처가 ‘사회적 파장이 큰 범죄와 공공질서를 크게 저해하는 범죄를 엄격히 심의해 고인의 안장을 거부한다"는 글을 사이트에 올려 아버지를 흉악범처럼 묘사한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서 운암과 인연맺은 구익균 선생 억울한 사정에 내일처럼…


이 소식은 곧 항일독립운동가단체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민성진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에게 알려졌고, 이때부터 민 회장은 자기의 일처럼 구혜란 씨(오른쪽 사진)를 도왔다. 구혜란 씨는 민 회장 등의 도움과 조언을 받아 지난 5월 7일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중앙행심위)에 ‘보훈처의 안장 거부 처분 취소’ 행정심판을 청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 11월 26일 중앙행심위로부터 국가보훈처의 처분을 취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안장거부 통보를 받은 지 7개월 만의 낭보였다.

특히 이런 노력 과정에서 구익균 선생의 사문서 위조 혐의는 채권단장으로 영세업자를 돕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군사정권의 정치적 의도로 조세 포탈 혐의도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게 입증돼 구익균 선생의 명예도 말끔이 회복됐다.


행정심판은 위법·부당한 행정처분 등으로 권리·이익을 침해받은 국민이 행정기관에 제기하는 권리구제 절차로, 행정기관은 중앙행심위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즉각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절차를 밟아야 한다. 보훈처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처분 취소 결정을 통보받으면 대전현충원 안장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성진 회장(왼쪽 사진)이 구혜란 씨를 도와 구익균 선생의 명예회복과 국립묘지 안장을 도운 것은 외할아버지인 운암 김성숙 선생이 말년에 갈 곳이 없어 애를 태울 때, 구익균 선생이 서울 구의동에 있는 자신 소유의 땅 10평을 흔쾌히 내주어 피우정(避雨停)을 지을 수 있게 해준 데 따른 보답에 다름아니었다.


구익균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며 중산, 상해 등지에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운암 김성숙 선생과 교분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인연이 바탕이 되어 운암 선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땅 일부를 떼어 여생을 지낼 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운암 선생의 외손 민성진 회장은 외할아버지를 도와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항일독립 애국지사가 홀대를 받는 현실을 묵과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구익균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의 당위성을 알리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항일독립운동가단체들이 이 일에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뒷받침 역할을 담당했다.

 

구씨의 7개월 노력 결실…시공 넘은 보은행 피우정 복원으로 꽃 필 듯


7개월 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던 날, 민성진 회장은 이 기쁜 소식을 온 국민께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연합뉴스에 연락을 했고, 마침내 구익균 선생의 국립묘지 안장 결정 소식이 딸 구혜란 씨와의 연합뉴스 인터뷰 기사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구익균 선생의 딸 구혜란 씨. 사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피우정이 있던 구의동 옛 자리에 피우정 복원을 기획하고 현재 광진구와 협의 중에 있어,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두 독립운동가 후손의 아름다운 인연은 머지않아 피우정 복원으로 만개할 전망이다.


항일독립 투쟁에 앞장섰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귀한 뜻을 이어 손자와 딸로서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민성진 회장과 구혜란 씨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각박해진 세상에 모처럼 훈훈한 온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file0 File #1   |   20.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국민일보] “日 정부, 안중근 의사 모독 사과하라”
다음글 [프레시안]조선의 붉은 승려, 운암 김성숙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