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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사]금강산에서 온 붉은승려"봉선사 태허 스님"
관리자
조회수 : 2404   |   2011-01-20


금강산에서 온 붉은승려

봉선사 태허 스님 김 성 숙 1898~1969

과반 전북지방을 순회강연 중이든 민전 부의장 김성숙 씨는 가증한 반동분자의 무언(誣言)으로 말미암아 부득의 영어의 몸이 되여 있어 항간의 물의가 자자한 이때 김성숙 씨는 뇌옥(牢獄)에서 다음과 같은 개탄의 소감을 발표하였다

첫째 조선민족의 내부에 일본제국주의자의 망하든 여습이 그대로 남어 있어 이간 중상 아유 순용으로 간얄푼 자기생명을 무의식하게 하로하로 연장하려고 자손만대의 건국성업과 세계평화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없이 그날그날 지내는 자들이 간활한 조선말 하는 일본사람과 미국말 하는 조선사람이 서로 엉키여서 해방은인인 미군정관들로 하야금 조선에 대한 바른 견해와 바른 지식을 못 가지게 하는 것

둘째 미군정관들이 조선에 대한 지식과 견해가 너무 결여하야 조선의 혁명가들이나 정치운동자들을 무식하고 일종 저급인으로 취급하며 심지어 야만인 취급하는 감이 있다 그것은 금반 우리사건만 보아도 일부 불량배들이 계획적으로 따러단여 가며 방해하다가 결국 음모에서 허위보고한 것이 분명하다 3, 4인의 촉청(促靑)원들이 모순불통일된 것만 보아도 넉넉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의하야 판결하는 것을 보며 우리도 역시 무고하는 그 자들과 꼭같은 저열한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

셋째 미국의 전통적 건국정신인 ‘워싱톤’의 자유평등주의와 ‘윌손’의 민족자결 ‘루―스벨트’의 국제민주주의평화론과는 너무나 엄청나게 차이 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36년간 일본제국주의자의 독아 밑에서 오날 해방을 위하야 망명에서 망명으로 투옥에서 투옥으로 백절불굴 싸워왔었으나 직접 전쟁에 참가하야 일본군의 무장을 우리 손으로 해제치 못함으로 남부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 잔재 즉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도량이 그대로 있는 것과 우리의 자주독립을 연합국 우방에 의존하고 있음으로이다

그렇다 은(恩)은 은이요 원(怨)은 원이다 장구한 전화를 무릅쓰고 귀중한 생명과 막대한 재산을 버려가며 세계파시스트와 군국주의를 쳐부심으로 조선도 해방되였으며 방금 국제헌장과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야 신성한 약속을 수행키 위하야 서울에서 공동위원회가 개최되고 있는 이때 민주주의독립운동자들을 이유도 당치 않은 몰상식한 무고에 의하야 불법구금처벌 등 거조는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세계평화 정책의 커다란 오점이다 다만 이것은 미국의 민주주의 평화 수호자들에게 알리고 싶다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7일치에 실려있는 김성숙 글이다. ‘옥중에서 동포에게’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이 되면서 민전을 널리 알리고자 호남 고장을 돌며 강연하다가 미군정에 붙잡혀 그해 가을까지 징역을 살았다. ‘해방당한’ 조국에 돌아온 것이 1945년 12월이었는데, 임시정부 국무위원 감목으로 임정과 국내 좌익을 이어주고자 애썼으나 그르치고 임정을 나와 민전 일에 골똘하던 판이었다.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鐵山)에서 가난한 농사꾼 맏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고향마을에서 대한독립학교를 다녔고, 19살 나던 1916년 경기도 양평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본사인 양주 봉선사(奉先寺)와 금강산을 오가며 한용운(韓龍雲)·김법린(金法麟) 같은 먼저 깨달은 승려들과 가까이 지내며 민족의식을 키웠는데, 용문산에서 만난 여여거사 입김이 컸다.

여여거사(如如居士)는 유대치(劉大痴)를 말한다. 본이름이 홍기(鴻基)였던 유대치는 백의정승(白衣政丞) 소리를 듣던 초야인물로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개화파 목대잡이였다. 여여거사는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가림천을 내리자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한양 유씨 집안에서는 그가 용문산으로 들어가 토굴을 묻고 좌선(坐禪)으로 남은 목숨을 보냈다고 한다. 허물없이 지내는 동지였던 역관 오경석(吳慶錫)과 같은 나이였으니 1831년생으로 용문산으로 들어간 것은 56살 때가 된다.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서광범·이종원·이정환·박제형·오경석 삼형제·김영한 형제·한세진·이희목 같은 혁명 원둥치들이 다 불자(佛子)였다. 김성숙이 입산하여 태허(泰虛)라는 불명으로 중 노릇을 비롯했을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86살이 된다. 좌선으로 한소식 했을 여여거사니 살아있었을 수도 있고, 열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입김이 용문산 언저리에 짙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김성숙이 김충창(金忠昌)이라는 이름으로 혁명가 길을 걷게 된 데에 여여거사 입김이 크게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든 사람은 김충창이었다. 그는 조선 청년들 생활이 가장 어려웠던 1922년에서 1925년까지 내 이론공부를 이끌어주었다. 나는 김충창이 아주 예외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지독히 가난한 농군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들에 나가 밭일을 하였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는 못했지만, 마을에 있는 유식한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열여섯살에 기독교신자가 되어 기독교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는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열여섯살에 집을 뛰쳐나와 금강산에 가서 중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산 한가운데에 있는 유점사(楡岾寺)에서 그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현대철학도 연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1919년까지 머물러 있었다.

헤겔의 변증법 덕분에 그는 쉽사리 맑스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의 가난과 천성적인 정의감 때문에 자연히 사회혁명에 대한 신념에로 돌아서게 되었다. 1922년에 다른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김충창은 자기들의 정치활동을 해나갈 자유가 있는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 6명은 문학단체를 만들고 《황야(黃野)》라는 잡지를 내었다. 그 내용은 철학, 시, 단편소설, 문학일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김충창을 포함하여 3명의 젊은 승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나머지 3명은 혁명이란 도무지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하면서 금강산으로 되돌아갔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노래》에 나오는 대문이다. 공산주의 혁명가 김산(金山) 곧 장지락(張志樂)이 한 말로, ‘금강산에서 온 붉은승려’라는 항목이다.

3·1운동에 들었다가 2년 징역을 살았고, 1921년 옥을 나와 조선노동공제회와 무산자동맹에 들어갔다. 1924년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 조직인 창일당 결성에 들었고 기관지 《혁명》을 박아내었다. 북경에서 의열단에 들었고, 1925년 광동 중산대학에 들어갔다. 1927년 광주봉기에 들었고, 중국 반제국주의동맹 긴한이로 기관지 《봉화》·《반일민족》 편집위원을 하였다. 1932년 광서성 성립사범대학에서 1년 동안 교수 노릇을 하였고, 34년 상해에서 《일본경제사론》·《변증법전정》·《산업합리화》·《중국학생운동》을 조선말로 옮기었다. 김산 되돌아봄이다.

“1923년 겨울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함과 동시에 나는 김충창 외 8명 동지와 함께 힘을 합하여 북경에서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박아내었다. 나는 격월로 박아내는 이 학생잡지에 3명 편집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이 잡지는 공산당 동조자, 좌익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한테서 지지를 받았다. 이 잡지는 32페이지짜리로, 창간호는 800부를 찍었는데 6개월 이내에 3,000명 고정 독자를 가지게 되었다. 김충창은 이 잡지 주필이었으며 이 잡지를 위해 수많은 주옥같은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은 내 사상에 커다란 감화를 주었다. 북경에는 조선문자 인쇄소가 없었다. 그래서 김충창은 모든 지면을 자기 스스로 판을 써서 이것을 석판인쇄하였다. 이 작업을 하느라고 그는 거의 눈이 멀었다. 그래서 북경협화의과대학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조선혁신자연맹 간부들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만들어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뽑혀 잡지 《민주전선》을 박아내었다. 1938년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얽어 지도위원 겸 정치조장을 맡았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 12월 귀국하여 임정과 좌익을 이어주려고 애썼으나 그르치자 임정을 나왔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얽는 데 들어 부의장을 맡았다. 1947년 근로인민당 중앙위원과 조직국장을 맡았다. 1948년 5·10단선에 반대하였고 50년 제2대 민의원선거에 제주도에서 출마하였으나 떨어졌다. 1957년 민주혁신당 정치위원이 되었고, 11월 제4대 민의원선거를 앞두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붙잡혀 징역 12년을 구형받았으나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여섯달 만에 풀려났다. 1960년 사회대중당 창당에 뛰어들었고, 61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세우는 데 들어 의장단으로 뽑혔다. 《아리랑》 ‘붉은승려가 사랑에 빠지다’라는 항목 한 어섯이다.

1927년 늦여름에 김충창은 연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였다. 첫사랑이면서도 격심한 연애였다. 상대 아가씨는 중산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광동 아가씨로, 대단히 현대적이었으며 부르조아였다. 김충창은 오성륜과 내가 자기를 배반자로 생각한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자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네가 연애를 한다면 나보다도 훨씬 나쁠 걸세. 전에 중이었던 녀석이 어떻게 되는지 자네는 알겠지? 도저히 돌이킬 수가 없네 그려” 하고 그는 괴로워하며 내게 말하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그의 친구들 모두가 이 아가씨와 손을 끊기를 바랬다. 나는 그의 ‘멍청한 짓거리’를 지지하였으며 힘닿는 한 이 연인들을 도와주었다. 나는 김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였다. “혁명가도 역시 남자이고 인간이다. 어찌되었든 이 연애는 진행될 것이다. 너희들에게 반하는 아가씨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너희들이 모두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반국가행위자로 잡혀갔으나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65년 통일사회당 당수로 모셔졌으며, 66년 신한당 정무위원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이 되었고, 68년 지도위원이 되었다. 서울 시립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눈을 감은 것이 1969년 4월 12일. 한뉘를 조국광복과 더불어 함께 일매져서 즐겁게 살 수 있는 인민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신 벗을 사이가 없었던 ‘금강산에서 온 붉은승려’ 열반은 시봉 드는 사람 하나 없이 스산한 것이었다.

얼마 전 김원봉 장군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김성숙 선생 아드님이 나와서 아버지 혁명활동을 증언하고 있었다. 아드님이 김충창 첫사랑이었던 그 광동 출신 처녀 몸에서 난 자식인지 모르겠다. 김충창에게는 세명 자식이 있다고 한다. 모두 중국에 있다. 국내에는 핏줄 하나 없다. 해방 바로 뒤 봉선사 승려들 혁신불교동맹운동을 가르치기도 한 태허 스님 김성숙 선생이었다.

태허 스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것은 1960년대 끝 무렵이었다. 산문(山門)에 있을 때였는데, 망백(望百)도 훨씬 넘은 극로비구(極老比丘)들한테 듣던 ‘당취’ 이야기는 여간 손에 땀을 쥐게 하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상투도 틀지 않은 엄지머리 총각으로 개남장(開南將) 밑에서 왜병·관병과 싸웠다는 그 늙은 스님네는 일해대사(一海大師) 서장옥(徐璋玉)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취부대가 농군부대와 다른 막집을 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막되먹은 중을 가리키는 ‘땡추’ 말밑이 바로 ‘당취(黨聚)’라는 것이었다. 주자이데올로기에 밀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피 끓는 중들이 얽은 불교비밀결사체가 당취인데, 변조대사(遍照大師) 신돈(辛旽)이 당취 첫 한아비이고 그 법통을 받은 이가 일해 스님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해 스님 법통 받은 이가 바로 태허 스님이라는 것이었다. 용문산과 금강산에는 태허 스님 두리에 당취들이 있었다며 주먹을 부르쥐던 극로스님들이었다.

우리는 비상정치회의 주비회에서 탈퇴할 때 좌우 양익의 편향을 지적하고 단결합작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좌우 양익의 합작으로서만 전국적 통일적 림시정권을 건립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 후 여러 단체와 련합하여 좌우 양익에 대하여 통일단결에 관한 조건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에서는 돌연히 비민주적 방식으로서 최고정무위원회를 선출한 후 그것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변장하였다. 이것은 다수의 민주주의 단체를 포괄한 민주주의민족전선과의 통일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실질적으로 다수의 민주주의적 단체를 포괄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하여 민주단결의 로선을 밝히는 동시에 우리는 계속하여 각 민주주의 단체와 협력하여 좌우 양익의 통일단결로서 독립자주적 통일정권 수립을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려 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가 열린 1946년 2월 15일 서울 종로2정목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김성숙·김약산·장건상·성주식이 낸 성명서이다. 이태준 의장 안동받아 단상에 오른 김성숙이 한 말. “첫째로 수십년 동안 일본제국주의 압박하에서 고생하시던 여러 동지에게 따뜻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소위 비상정치회의 탈퇴파로 유명합니다.(박수) 탈퇴한 이유는 거기에 민주주의가 없기 때문입니다.(대박수) 또 비상국민회의는 소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변경되어 리 박사 김구 두사람을 령수로 추대하였습니다. (연단을 치면서) 령수, 령수가 다 무엇입니까.(박수) 령수란 ‘히틀러’나 ‘뭇소리니’를 부르는 말입니다.(대박수) 우리는 남조선의 무슨 의원인가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대박수) 그것은 정치협잡입니다.(대박수) 비상정치회의에는 단연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성명합니다. 우리는 반민주주의자와 투쟁하기에 노력합시다.”(대박수)

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당 중앙위 비서인 김중린 동지가 심근경색으로 향년 87로 서거하였다.

2010년 4월 28일 조선중앙통신 보도인데, 국장으로 모셔질 만큼 높은 기림을 받는 혁명 1세대인 김중린(金仲麟)은 김성숙이 얽이잡았던 민족해방동맹 맹원이었다.

출처 : 《현대사 아리랑-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김성동 지음, 녹색평론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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