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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잔치 다음날 집에 돌아온 영웅들
관리자
조회수 : 2236   |   2010-12-02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이 입국했다. 의정원 홍진 의장과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 재무부장 조완구, 법무부장 최동오, 내무부장 신익희, 국무위원 조성환, 황학수, 장건상, 김붕준, 성주식, 유림, 김성숙, 조경한 등이었다. 제1진으로 입국한 요인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과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 선전부장 엄항섭, 참모총장 유동열이었다.

두 팀으로 나눠 9일이나 사이를 두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비행기 사정이라고 하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수십 명 인원 수송을 그렇게 복잡하게 할 리가 없다. 당시의 남한 점령군이 비행기 보내는 데 그렇게까지 힘들었을 수가 없다.

분리 귀국을 바라는 동기가 누구에게 있었나? 미군정 입장은 아니다. 임정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분리 귀국시켰다는 추측이 있지만, 당시 하지 사령관은 연합국 외상 회담 전에 뭔가를 만들려고 일정에 쫓기는 입장이었다. 

내가 이승만에게 너무 혐의를 많이 건다고 불평하는 독자가 계시더라도 할 수 없다. 여기에서도 그 사람 냄새밖에 안 난다. 임정을 분리 귀국시켜 자기 노선에 따르도록 설득하기 쉬운 상황을 그는 만들고 싶었다. 1진, 2진 구분 과정에서 임정 내 의심과 불만을 일으키는 것도 그는 바랐다. 그리고 하지의 '임시 한국 행정부' 프로젝트를 그가 맡고 있었으므로 비행기 일정 결정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제2진 요인들은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귀국이 늦었을 뿐 아니라 날씨를 이유로 비행기가 목포에 내렸다. 대규모 환영회는 그들이 목포에서 자동차로 북상하는 동안 열렸고, 그들은 이튿날에야 서울에 도착했다. 뒤처진 동지들의 도착을 코앞에 두고 김구가 조선생명 발코니에 이승만과 나란히 서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 있을 때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임시정부 及 연합군환영회본부 주최의 臨時政府奉迎會는 1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참가 단체는 경성대학을 필두로 전문, 중학, 소학 등 100여교와 기타 500여 단체에 달하였는데, 식은 尹潽善의 사회로 개막하여 먼저 吳世昌으로부터 갈망하던 임시정부 간부가 환도하였으니 이 지도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자는 개회사가 있고 李仁의 봉영문 낭독이 있은 후 權東鎭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조선 초등학교 생도를 선두로 기 행렬에 옮기어 행렬은 안국정 네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2층에서 축하를 받는 金九, 李承晩 앞에서 대한임시정부 만세와 金九 만세, 李承晩 만세를 부르고 경성역 앞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환영회 이튿날에야 서울에 도착한 제2진 요인들이 기분은 안 좋았겠지만,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김구 등 제1진 요인들이 그 사이에 입장 표명을 최대한 아끼며 조심스럽게 처신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9일간의 차이가 요인들의 심리나 외부와의 관계, 그리고 상호관계에 영향을 끼친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소앙, 김붕준, 김성숙, 최동오, 장건상, 유림, 김원봉. 12월 25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임정 안에 만들어진 특별정치위원회의 면면이다. 모두 제2진 귀국자다. 이들을 서중석은 "좌파와 합작파 국무위원"이라 불렀는데,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80쪽) 나는 무슨 '파'라는 이름을 너무 서둘러 붙이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좌파'라는 것도 당시로는 매우 막연한 규정이었고, 하물며 '합작파'란 것을 하나의 '파'로 이름붙일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들이 어떤 '파'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으로 본다는 인상을 지나치게 강하게 주는 것 같다. 

11월 23일을 앞두고 제1진과 제2진을 가르는 데는 많은 고심이 있었다. 여러 가지 기준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렸겠지만, 결국은 제1진의 즉시 활동을 위한 '기동성'과 임정의 결속력을 지키는 '안정성', 두 가지 기준이 중심이었다. 제1진에 주석, 부주석과 비서진을 넣어 국내의 어떤 상황에도 최소한의 필요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면서 두 그룹 사이의 위화감을 최소화하는 안정성을 기하려 했을 것이다. 

안정성을 위해서는 두 그룹을 지나치게 기존 정치 성향에 따라 가르지 않도록 조심했을 것이다. 제1진 요인 6인 중 확고한 '김구의 사람'은 선전부장 엄항섭뿐이었다. 그런데 몇 주일 후 좌익과의 합작에 주력하는 특별정치위원회가 제2진 인물로만 구성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1월 23일에서 12월 2일까지 한 그룹이 상해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고 한 그룹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동안 두 그룹의 경험 차이가 좌익을 대하는 태도에 상당한 정도의 편향적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예컨대 공산당과 인공이 상대 못할 존재라는 이야기만 해도 제2진 인사들보다 제1진 인사들이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장준하가 중경에서 임정의 분파적 양상에 분개, "임정을 폭파하고 싶다"는 극언까지 했지만(10월 1일자), 전쟁 중 중경의 제한된 조건 속에서 임정 요인들이 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할 여지는 크지 않았다. 내무부장 신익희가 '경위대'란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한 획책 정도가 장준하를 격분시킨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국내에 들어와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 속에 노선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3·1운동에서 해방까지 26년간 민족 독립의 깃발을 지켜온 것, 그것이 해방 당시 온 국민이 임정에 기대감을 가지는 결정적 근거였다. 임정의 정치적 가치는 능동적 정책보다 흔들리지 않는 '지킴'의 자세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움직여야 할 상황에 왔다. 움직이면서도 '지킴이'로서 근본적 가치를 최대한 지켜내는 것이 귀국 후 임정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임정 귀국 두 달 만인 1946년 1월 23일 김원봉-김성숙-성주식 3인의 비상국민회의 탈퇴로 임정 결속력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한다. 그 동안 임정의 정치적 가치가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식으로 훼손되어 갔는지 살펴보려 한다.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이 입국했다. 의정원 홍진 의장과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 재무부장 조완구, 법무부장 최동오, 내무부장 신익희, 국무위원 조성환, 황학수, 장건상, 김붕준, 성주식, 유림, 김성숙, 조경한 등이었다. 제1진으로 입국한 요인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과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 선전부장 엄항섭, 참모총장 유동열이었다.

두 팀으로 나눠 9일이나 사이를 두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비행기 사정이라고 하는데,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수십 명 인원 수송을 그렇게 복잡하게 할 리가 없다. 당시의 남한 점령군이 비행기 보내는 데 그렇게까지 힘들었을 수가 없다.

분리 귀국을 바라는 동기가 누구에게 있었나? 미군정 입장은 아니다. 임정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분리 귀국시켰다는 추측이 있지만, 당시 하지 사령관은 연합국 외상 회담 전에 뭔가를 만들려고 일정에 쫓기는 입장이었다.

내가 이승만에게 너무 혐의를 많이 건다고 불평하는 독자가 계시더라도 할 수 없다. 여기에서도 그 사람 냄새밖에 안 난다. 임정을 분리 귀국시켜 자기 노선에 따르도록 설득하기 쉬운 상황을 그는 만들고 싶었다. 1진, 2진 구분 과정에서 임정 내 의심과 불만을 일으키는 것도 그는 바랐다. 그리고 하지의 "임시 한국 행정부" 프로젝트를 그가 맡고 있었으므로 비행기 일정 결정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제2진 요인들은 기분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귀국이 늦었을 뿐 아니라 날씨를 이유로 비행기가 목포에 내렸다. 대규모 환영회는 그들이 목포에서 자동차로 북상하는 동안 열렸고, 그들은 이튿날에야 서울에 도착했다. 뒤처진 동지들의 도착을 코앞에 두고 김구가 조선생명 발코니에 이승만과 나란히 서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 있을 때 그 속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임시정부 及 연합군환영회본부 주최의 臨時政府奉迎會는 1일 오후 1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참가 단체는 경성대학을 필두로 전문, 중학, 소학 등 100여교와 기타 500여 단체에 달하였는데, 식은 尹潽善의 사회로 개막하여 먼저 吳世昌으로부터 갈망하던 임시정부 간부가 환도하였으니 이 지도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자는 개회사가 있고 李仁의 봉영문 낭독이 있은 후 權東鎭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하고 조선 초등학교 생도를 선두로 기 행렬에 옮기어 행렬은 안국정 네거리에 이르러 조선생명보험회사 2층에서 축하를 받는 金九, 李承晩 앞에서 대한임시정부 만세와 金九 만세, 李承晩 만세를 부르고 경성역 앞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자유신문> 1945년 12월 0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환영회 이튿날에야 서울에 도착한 제2진 요인들이 기분은 안 좋았겠지만,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김구 등 제1진 요인들이 그 사이에 입장 표명을 최대한 아끼며 조심스럽게 처신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9일간의 차이가 요인들의 심리나 외부와의 관계, 그리고 상호관계에 영향을 끼친 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소앙, 김붕준, 김성숙, 최동오, 장건상, 유림, 김원봉. 12월 25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임정 안에 만들어진 특별정치위원회의 면면이다. 모두 제2진 귀국자다. 이들을 서중석은 "좌파와 합작파 국무위원"이라 불렀는데,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80쪽) 나는 무슨 "파"라는 이름을 너무 서둘러 붙이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좌파"라는 것도 당시로는 매우 막연한 규정이었고, 하물며 "합작파"란 것을 하나의 "파"로 이름붙일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들이 어떤 "파"에 속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으로 본다는 인상을 지나치게 강하게 주는 것 같다.

11월 23일을 앞두고 제1진과 제2진을 가르는 데는 많은 고심이 있었다. 여러 가지 기준을 고려하여 결정을 내렸겠지만, 결국은 제1진의 즉시 활동을 위한 "기동성"과 임정의 결속력을 지키는 "안정성", 두 가지 기준이 중심이었다. 제1진에 주석, 부주석과 비서진을 넣어 국내의 어떤 상황에도 최소한의 필요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면서 두 그룹 사이의 위화감을 최소화하는 안정성을 기하려 했을 것이다.

안정성을 위해서는 두 그룹을 지나치게 기존 정치 성향에 따라 가르지 않도록 조심했을 것이다. 제1진 요인 6인 중 확고한 "김구의 사람"은 선전부장 엄항섭뿐이었다. 그런데 몇 주일 후 좌익과의 합작에 주력하는 특별정치위원회가 제2진 인물로만 구성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1월 23일에서 12월 2일까지 한 그룹이 상해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고 한 그룹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동안 두 그룹의 경험 차이가 좌익을 대하는 태도에 상당한 정도의 편향적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예컨대 공산당과 인공이 상대 못할 존재라는 이야기만 해도 제2진 인사들보다 제1진 인사들이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장준하가 중경에서 임정의 분파적 양상에 분개, "임정을 폭파하고 싶다"는 극언까지 했지만(10월 1일자), 전쟁 중 중경의 제한된 조건 속에서 임정 요인들이 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할 여지는 크지 않았다. 내무부장 신익희가 "경위대"란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려 한 획책 정도가 장준하를 격분시킨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국내에 들어와서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 속에 노선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3·1운동에서 해방까지 26년간 민족 독립의 깃발을 지켜온 것, 그것이 해방 당시 온 국민이 임정에 기대감을 가지는 결정적 근거였다. 임정의 정치적 가치는 능동적 정책보다 흔들리지 않는 "지킴"의 자세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움직여야 할 상황에 왔다. 움직이면서도 "지킴이"로서 근본적 가치를 최대한 지켜내는 것이 귀국 후 임정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임정 귀국 두 달 만인 1946년 1월 23일 김원봉-김성숙-성주식 3인의 비상국민회의 탈퇴로 임정 결속력의 한계가 드러났다고 한다. 그 동안 임정의 정치적 가치가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식으로 훼손되어 갔는지 살펴보려 한다.

/김기협 역사학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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