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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태허스님 ‘행장’
관리자
조회수 : 2030   |   2010-03-03


<사진>1969년 태허스님의 영결식이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엄수됐다.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태허스님 ‘행장’

1898년 3월10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강암동(江岩洞)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문환(金文煥) 선생, 모친은 임천 조씨(林川趙氏). 어려서 이름은 김성암(金星巖). 어머니가 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낳았을 만큼 불연(佛緣)이 깊다.

운암(雲巖)은 호(號)로 사용했다. 서당에 다니며 틈틈이 한학을 익히다 을사늑약(1905년)후 마을에 세워진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선생님들에게 이순신과 을지문덕 등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웠다.

풍곡스님을 은사로 출가 조계사에서 사회장 엄수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던 삼촌이 찾아왔다. 당시 어른들의 말씀을 어깨 너머로 들으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몰래 집을 나왔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간 그는 배를 타고 청진을 통해 만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검문에 걸려 여관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몰래 빠져나가 석왕사에서 만난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로 가서 출가했다. 은사는 풍곡신원(楓谷信源)스님. 도첩(度牒)을 받은 것은 1916년 12월3일이고, 도첩에 기록된 출가일은 1916년 11월10일이다.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용문사와 수국사 창화강원(彰華講院)에서 2년 6개월간 교학을 깊이 공부했다. 당시 창화강원의 교수(지금의 강주)는 이동은(李東隱)스님. 이후 광릉(남양주) 봉선사에서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월초스님은 풍곡스님의 은사로, 성암스님에게는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분이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있던 월초스님을 통해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만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 시기에 봉선사의 몇몇 스님과 양주와 포천에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 연유가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2년간 투옥됐다. 석방 후 봉선사로 돌아온 1922년 성월(惺月)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수계 장소는 소요산 자재암. 이 때 받은 법명이 ‘성숙(星淑)’이다. 그 뒤로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으며, 감시가 심해지자, 월초스님의 권유로 북경으로 건너갔다. 이때가 1923년. 불교유학생으로 북경에 간 스님은 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했다.

조선의열단에도 가입했으며, 1926년 광동에서 열린 광동코뮨에도 참가했다. 1936년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고, 중일전쟁 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만드는 등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중.일전쟁 이후 항일광복운동의 우파인 김구계와 좌파인 김원봉계 통합에 앞장섰으며,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통합을 이끌어 냈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내무차장, 이듬해 2월에는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돼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및 외교전반에 관여했다.

1943년 3월 내무부 차장, 4월 선전부 선전위원, 1944년 4월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해방 후 귀국해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헌신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수차례 투옥됐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도 옥고를 치렀다.

1969년 4월12일 오전10시 71세를 일기로 원적에 들었고,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社會葬)으로 엄수됐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으며, 2004년에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안장됐다.

독립운동 시절 상해에서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 등 20여 권 책을 번역 또는 저술했다.

[불교신문 2603호/ 3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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