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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근현대 선지식의 天眞面目(태허성숙)
관리자
조회수 : 1949   |   2010-03-03


<사진>풍곡스님에게 받은 전법계첩. 법호가 태허(太虛)와 보허(步虛) 두 가지로 적혀 있다.

85. 태허성숙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대표적인 스님 가운데 한 분이 태허성숙(太虛星淑, 1898~1969)스님이다. 특히 대한민국이 법통(法統)을 계승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평생 독립운동과 반독재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헌신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 스님이다. 님 웨일즈의 유명한 작품 <아리랑>에 나오는 주인공 김산의 정신적 스승으로 묘사되기도 한 태허스님의 행장을 살펴보았다.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에서 도움말과 사진 등 자료를 제공했다.

“상 받으려고 독립운동 한 것 아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역임한 유일한 스님

남양주 봉선사 월초스님 회상서 ‘정진’

○… 1922년 어느 날 광릉 봉선사의 한 방. 월초스님이 두 손상좌를 불렀다. 태허스님과 운허스님이 노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태허와 운허는 출가 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청년승려’였다. 월초스님은 이미 교육을 통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불교학연구회(이후 명진학교, 지금의 동국대로 발전)를 설립하는 등 조선독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된다. 하지만 큰 뜻을 이루려면 너희들이 각자의 길을 갈 필요가 있다. 운허는 국내에서, 태허는 대륙에서 활동하거라.” 월초스님은 항일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는 중국 대륙으로 태허스님을 보냈다. 이후 태허와 운허는 노스님의 뜻을 따라 국내외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다.

<사진>스님으로는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태허스님.

○… 태허스님의 출가 인연도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다. 만주로 가서 항일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원산에서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려 여관에 감금됐다. 그때가 마침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석왕사에 가기 위해 분주했다. 여관을 몰래 빠져나와 인파에 묻혔다. 다음날 아침 절 마당을 산책하고 있는 한명의 스님을 보고 말을 건넸다. “여보시오. 나도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겄소.” 원산을 무사히 빠져나갈 요량이었다. 그 스님이 물끄러미 바라보면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출가를 하려고 하느냐.” 답했다. “불경을 공부하고 싶소이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스님을 따라 양평 용문사에 가서 출가사문이 됐다.

○… 출가 전에 이미 신구학문을 익혔기 때문에 절집에서의 공부를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용문사에서 2년 6개월간 경전을 두루 배웠다. 어느 날 은사인 풍곡스님이 불렀다. “너는 여기선 더 공부할 게 없구나. 큰절로 가서 노스님에게 공부를 더 하거라.” 노 스님은 풍곡스님의 스승인 월초스님. 봉선사 주지로 있던 월초스님은 당시 ‘조선불교계의 거목(巨木)’으로 존경받던 어른이었다. 광릉 봉선사로 주석처를 옮긴 후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불법(佛法)의 오묘한 진리에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정진했다. 훗날 태허스님은 당시 일을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많아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스님 노릇하는 방법을 모두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 수행자의 기초를 공부했다면, 광릉 봉선사는 조선독립의 의지를 더욱 깊게 다진 장소였다. 봉선사 주지 월초스님과 절친했던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이다. 특히 월초스님과 막역한 사이였던 손병희 선생이 자주 봉선사를 찾아왔다. 손병희 선생이 오면 월초스님은 손상좌인 태허스님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물도 갖다 드리고, 이불도 펴드렸다. 이 과정에서 손병희 선생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평소 마음 깊이 지니고 있던 조선독립의 큰 뜻을 펼쳐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리고 만해스님, 김법린 선생과도 알게 되었다. 봉선사에서 만난 인사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전개한 지사(志士)라는 사실은 태허스님이 평생 큰 뜻을 펼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 “내가 무슨 상(賞)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평생 독립운동과 좌우합작, 통일운동, 반독재운동에 참여한 태허스님은 그 흔한 ‘벼슬’도 맡지 못했다. 더구나 생전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의 적절한 예우를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스님은 정부를 원망하지도, 세상을 탓하지도 않았다. 가난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던 날도 “내가 무얼 바란 것이 아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을 뿐이다. 1969년 4월15일자 동아일보에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로, 평생 청빈하게 살면서 조국이 잘 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 대한민국 정부가 법통(法統)을 승계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지만, 해방 후에 오히려 더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남과 북, 좌와 우로 갈려 싸우는 ‘조국의 현실’에서 태허스님은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었다. 이승만에게 정치적 보복을 당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끼니조차 잇기 힘들어 결국은 건강마저 잃게 되었다. 하지만 뜻을 바꾸지는 않았다.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친구의 집 마당 귀퉁이에 가건물을 지어 머물렀다. 노산 이은상은 이 건물에 ‘피우정(避雨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말년에 약조차 변변히 쓸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살림 속에 병마와 처절하게 싸웠지만, 정부에서 주려는 ‘독립유공자 훈장’을 끝내 거절했다. 나라를 빼앗은 일본군 장교 출신의 대통령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한 대표적인 스님이 세 분 있다. 용성스님과 만해스님 그리고 태허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이 스님들은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나라를 빼앗긴 암흑의 시절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한 용성.만해.태허스님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지난 2005년 결성된 ‘운암선생기념사업회’는 2006년 국가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되어 태허스님을 선양하는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민성진 회장은 “혁신적 양심세력으로 민족을 위해 살다 가신 태허스님의 삶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통일과 바람직한 민족 문화형성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활동 계획을 설명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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