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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기획특집-(34) 운암 김성숙
관리자
조회수 : 2618   |   2009-09-29


,사진설명>(왼쪽에서 오른쪽으로)1 의자에 앉아 있는 운암 김성숙 선생. 2 운암 김성숙 선생이 중국 자녀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3 운암 김성숙 선생 장례식장(서울 조계사). 4 임시정부요인 2진 귀국 기념사진. 5 운암 김성숙 선생과 친구, 친구의 자녀들. [경기일보 2009-9-18] 조국독립·민족통일 위해 한평생 가시밭길 노산 이은상이 쓴 ‘김성숙 묘지명’은 그의 삶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 추호도 굽힘없이 살다가 1969년 4월12일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지냈다.” 1969년 경기도 파주에 동지들의 애도 속에 묻혔던 김성숙. 그 이듬해 1970년 묘비가 세워졌을 때의 묘비명 내용이다.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 살다가 사람. 운암 김성숙. 그만큼 한국근대사에서 독특한 존재를 만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1898~1969)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투사였고,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를 위해 온갖 고초를 겪었던 민주투사였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후 신산했던 근대사를 온몸으로 받아가며 살아갔던 그의 삶은 파란만장함 그 자체였다. 조선의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로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발간됐고, 일본에서는 이와나미(岩波)문고가 선정한 ‘세계 명작 100선’에 포함되기도 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에게 중요한 영감과 이론적 지도를 했던 금강산의 붉은 승려로 지칭된 김충창이 운암 김성숙이다. 그는 그 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숱한 가명과 이명을 갖고 있다. 김성암(金星岩), 태허(太虛), 창숙(昌淑), 성숙(成淑), 성엄(星嚴), 야광(夜光), 운암, 김충창 등의 다양한 이름만큼이나 폭넓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김성숙은 1898년 3월10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1916년 18살의 나이로 승려가 된 이후 경기도 고양군으로 온 가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에 해방 이후 김성숙은 고양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고양군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김성숙은 1908년 고향 철산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하여 나라를 구한 위인들과 일제의 통감부 설치로 인한 국권상실과 나라의 독립의 필요성에 일깨웠던 학교 교육에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던 대한독립학교는 1910년 나라가 망하면서 폐교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고 보통학교가 들어섰지만 일본학교라고 경멸하면서 김성숙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할아버지는 스스로 차린 글방(서당)에서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일본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경술국치 이후 근대식 학교에 보내는 대신 전통적인 서당에 보냄으로써 일본식 근대교육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김성숙은 그 무렵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삼촌뻘 되는 분으로부터 강렬한 영향을 받는다. 신의주 일대를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그의 영향으로 김성숙은 ‘가자 만주로! 참가하자 독립군에!’ 이렇게 마음먹고 독립군을 기른다는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만 생각하였다. 이에 1916년 봄 18살 때 집에서 땅 판 돈을 훔쳐 가지고 나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봉천으로 출발했다. 그는 압록강을 넘는 대신 중국말을 적게 쓰면서도 빨리 봉천으로 가는 길로 평양~원산~청진~두만강을 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만주행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 서강사에서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승려 풍곡신원(楓谷信元) 선사를 만나게 되고 그 길로 그를 따라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하였다. 이후 본사인 봉선사(奉先寺) 월초 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았다. 이후 김성숙으로 세상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2년 반쯤 공부하다가 본사인 광릉의 봉선사로 가서 정식으로 3년 동안 불교를 연구했다. 실상 고양으로 가족이 이거하게 된 것도 월초 스님이 중창한 수국사 소유의 땅을 소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선사 월초스님 아래에서 공부하던 그는 광릉 인근으로 사냥을 자주 왔던 천도교 손병희를 비롯하여 만해 한용운, 김법린 등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라 1919년 3·1운동 당일 서울 탑골공원 만세시위 현장에 있었다. 이후 김성숙은 봉선사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펼치게 된다. 3월29일 봉선사에서 모임을 갖고 구체적 활동에 나선 그는 봉선사 승려 이순재(李淳載)·김석로(金錫魯)·강완수(姜完洙) 등과 더불어 봉선사 서기실에서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이름으로 격문을 만들었다.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운동하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취지의 격문 200장을 만들어 그날 밤에 봉선사 인근 여러 마을에 뿌렸다. 이후 광릉천 만세시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5월19일 이순재, 김석로 징역 1년6개월, 김성숙 1년2개월, 강완서 1년 처분을 받았다. 1919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528번의 수인번호를 받았다. 1921년 4월28일 석방되어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며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합법적 공간이 만들어지자 많은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에 1922년 국내 최초의 상설적 사회주의 운동단체였던 무산자동맹 (無産者同盟) 및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가 조직되자 적극적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노동공제회에서 김성숙은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小作爭議)의 진상을 서울 본회 및 각 지방 지회(支會)에 알리는 등 적극적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애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서 출발하였으나 이 단체에 가담하면서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자유로운 학문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1923년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고려유학생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또한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과 친일파 거두를 처단하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찰서 등 일제의 중요기관을 파괴하여 일제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했던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승려출신이었음에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중국 북경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어 광동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광동성 광주시 소재 중산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 당시 조선인 혁명가 수백명과 함께 광동코뮨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좌익적 모험주의에 따라 200명의 조선인 혁명골간이 중국혁명을 위해 소금처럼 녹아갔다고 슬퍼했던 그 광동코뮨이었다. 이 뼈아픈 실패에 따라 김성숙은 중국인 애인인 두군혜(杜君慧)의 집에 피신하여 20여권의 책을 번역, 저술하였다. 이후 1928년 상해에서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在中國朝鮮靑年總聯盟), 1937년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투쟁동맹·조선혁명자동맹을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조선민족의용대(朝鮮民族義勇隊)를 만들어 간부로 활동하였고, 1942년에는 임시정부의 내무차장(內務次長), 외교연구위원, 국무위원이 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와 환국한 김성숙에게 해방된 조국은 안락한 삶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시대 이래 미군정,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이르기 까지 모든 정권으로부터 구속되었던 인물이다. 특히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 평양의 남북협상을 다녀온 뒤로 줄곧 혁신정당운동에 몸담았던 그는 죽는 날까지 가난과 벗하며 살아야 했다. 1969년 4월12일 피우정(避雨亭)에서 71세로 서거한 직후인 4월15일자 동아일보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 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그렇게 이 땅에서 잊혀진 혹은 버림받은 독립운동가가 한두명이 아니었지만 운암 김성숙의 그것은 자주적 통일을 염원하며 좌우에 물들지 않은 이 땅의 중간파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과 불화하였던 그를 쓰러지지 않고 살아가게 했던 단 한가지는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꿈이 김성숙의 일생을 고통스럽게 하였고, 여전히 우리민족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유해는 2004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한동민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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