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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로 떠나는 사찰(봉선사)-운암 김성숙
관리자
조회수 : 2206   |   2009-09-03


<사진설명>봉선사 피우정.운암 김성숙의 방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 한다. [책]경기도로 떠나는 사찰기행(봉선사)-운암 김성숙 운암 김성숙(1898-1969)은 평안북도 철산 어느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기독교는 그의 사상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집을 뛰쳐나온 운암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다. 금강산의 유점사에서 불교 교리 뿐 아니라 현대철학도 연구함으로써 사상적 깊이를 더해갔다. 특히 헤켈의 관념론에 심취해 있었으며, 변증법 이론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이러한 사상적 관심은 곧 그를 마르크스주의의 길로 이끌어 갔다. 1916년에는 독립군에 가입하기 위해 만주로 가려했으나 일본군에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용문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 바로 성숙(星淑)이다. 용문사에서 2년쯤 생활하다가 다시 봉선사로 거처를 옮겨서 계속 불교 교리를 공부해 나갔다. 그는 이곳에서 당시 봉선사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 불교계 인사 김법린, 한용운 등과도 교류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가사차림으로 마을에 내려가 선전활동을 펼친다. 그러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한다. 1922년에는 다른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북경으로 건너갔다. 정치활동을 자유로이 펼치기 위해서였다. 이 여섯 명은 문학단체를 만들고 “황야”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이 기간 동안에 김성숙을 비롯한 다른 세 명의 승려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23년 겨울에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독립혁명가 김산 등과 함께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인 “혁명”을 간행한다. 김성숙은 이 잡지의 주필로 활동하며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아리랑” 에 나오는 “붉은 승려 김충창” 은 바로 김성숙을 지칭하는 가명이라고 한다. 김성숙은 독립혁명가 김산과 오성륜 등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의열단 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는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되에 광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뮨에 참여했다. 코뮨 실패 이후에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이때 주은래의 중매를 통해 중국의 여성 공산당원이였던 두군혜(杜君慧)와 결혼하게 된다. 이렇듯 운암은 젊은 시절에 항일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항아는 운동과 좌우 합작, 통일운동을 펼쳐나갔다. 5.16 구테타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길을 줄기차게 걸었다. 말념에는 가난과 궁핍으로 고통 받아야 했는데, 친지들의 도움으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는 그 방을 “피우정(避 雨 亭)” 이라고 불렀다. 봉선사에 있는 피우정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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