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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투데이]“월초스님 당시 봉선사는 독립운동 본산지”
관리자
조회수 : 2861   |   2008-10-13


“월초스님 당시 봉선사는 독립운동 본산지” 신용철 교수, 기조발제 통해 월초스님 업적 설명 신용철 교수, 기조발제 통해 월초스님 업적 설명 봉선사 ‘월초스님 근대교육 사업’ 학술회의 개최 월운스님 “조선불교 선각자이자 독립운동 울타리” 김광식, 한동민 주제발제 후 신규탁, 지환스님 지정토론 근대불교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월초화상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월초문도회(문장 월운스님)와 봉선사(주지 인묵스님)는 지난 10일 오후 2~5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월초스님의 근대 교육 사업’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한동민 박사의 ‘월초스님과 근대불교계의 변화’, 김광식 부천대학 교수의 ‘월초스님과 교육사업’의 발제문 발표가 이어지며 이후 신규탁 연세대 교수와 봉선사 교무국장 지환스님의 지정토론이 진행됐다. 학술 발표에 앞서 삼귀의, 반야심경, 인묵스님의 개회사, 오영교 동국대 총장의 축사, 월운스님의 봉행사, 신용철 경희대 교수의 기조발제 순으로 고불 의전이 봉행됐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는 이날 ‘한국불교의 근대화와 교종의 본찰, 봉선사의 공헌 -월초스님의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기조 발제를 통해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에 1934년 이래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백남운 등이 있었는데 월초 스님은 그의 선구요 불교계의 중심에 있었다”고 평가한 뒤 그 근거로 박용하 스님과 김성숙 스님을 육성 보호한 것을 든다. 신 교수는 “월초스님이 주지였던 경기도 양주군 광릉의 봉선사는 당시 일본 경찰에게는 눈의 가시였으며 감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며 “1919년 3. 1운동 당시 지월 스님과 김성숙 등의 지도로 광릉내 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김성숙이 구속돼 옥고를 치렀고, 1932년 박용하 스님이 만주에서 돌아오자 양주경찰서장은 봉선사를 찾아 월초 스님을 추궁하자 스님은 손상좌인 박용하 스님을 만주에 보내 출가수행(漫行)을 시켰다고 둘러댔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또한 “월초스님은 무너져가는 조선왕조 말의 무기력하고 혼란한 시대와 일제의 강점기를 살면서 민족의 지도자와 불교의 선각자적 스님으로서 그 시대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위업을 성취한 분”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매우 시급한 과제였던 인재의 양성을 위해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몇 차례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동국대학교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월초스님은 1934년 입적을 앞두고 유촉으로 사재를 털어 봉선사에 전문 강원을 설립하게 해 관리와 강사를 운허스님에게 맡겼다”고 덧붙였다. 이날 한동임 수원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국근대불교사의 홍월초 스님’ 주제발제를 통해 “대한제국 성립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불교계는 개화파(강대련, 진진응, 김지순, 김구하), 보수파(나청호, 김용곡, 서학암), 중도파(홍월초, 이보담, 이회광, 김석옹)로 구분할 수 있다”며 “이러한 구분은 1906년 명진학교 설립과 관련한 태도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연구사는 “월초스님은 조선시대 이후 대한제국기 마지막 북한총섭이었고, 불교연구회와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며 “봉선사의 당우를 중수하고 홍법강원을 설립하도록 전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가장 모범적인 승려의 삶을 마감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홍월초의 꿈 -그의 교육관에 나타난 민족불교’ 주제발제를 통해 “홍월초의 삶이 민족불교론의 논리에 서 있다고 본다”며 “1930년대 홍월초의 입장은 1900년대의 노선, 의식에서 완전 결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롭게 변한 불교환경에서의 조정, 변용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전통 불교학이 멸실되는 지경에서, 근대문명과 근대 불교학이 위세를 부리는 현실에서 홍월초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굳건한 나무를 잡은 것”이라며 “구한말부터 입적하는 그날까지 불교발전을 위한 고뇌, 고투, 헌신으로 불교교학의 밑거름을 튼튼히 해 주고, 민족불교의 일선에서 보살정신으로 삶의 여정을 걸어갔던 홍월초의 지성, 민족불교 지향을 오늘의 이 시점에서 온고이지신의 정신으로 다시 살피고, 불교사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김 교수는 △봉선사에 대한 광의의 연구 △일제하에서 교종 대본산으로서의 봉선사 연구 △봉선사의 주역인 고승, 승려에 대한 탐구 △민족불교론에 대한 다양한 검토, 분석을 주문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앞서 월초문도회 문장 월운스님은 봉행사를 통해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우뚝 나서신 분이 바로 홍월초(洪月初) 큰스님”이라며 “일제하에서 어떻게 하면 사찰을 수호하고 우리불교를 지켜내고 키워갈 수 있을까, 명분과 실리를 도모했던 지혜로운 고승이었던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큰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월운스님은 이어 “ 조사전(祖師殿)에 영정을 모시고, 매년 재(齋)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어른스님의 뜻이 어디 전각(殿閣) 안에만 갇혀 있겠는가 싶기도 하고, 어른스님의 뜻과 덕을 옳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자책도 속으로 해보았다”며 “노납의 이런 속내를 어떻게 알아주셨는지, 귀한 인연이 있어 그랬는지 여러 훌륭하신 분들이 오늘 뜻 깊은 학술회의를 마련하신 걸 보니, 이제는 노승의 마음이 참으로 가볍다”며 월초스님에 대한 학술회의를 갖게 된 배경과 감회에 대해 설명했다. 유응오 기자 arche44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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