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밀양방송]약산의 잃어버린 70년
관리자
조회수 : 1977   |   2008-07-30


약산의 잃어버린 70년 조선의용대의 뜨거운 항전 [2008-07-30 오후 4:40:00] ▶중국전장(中國戰場)에서의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는 총대와 2개 지대로 편성되었는데 뱃지 수여에 이어 약산 총대장이 제1지대와 제2지대장에게 각각 군기 하나씩을 수여하자 대원들은 그 군기 밑에 서서 왜적을 섬멸하겠다고 기세도 더 높이 선서함으로써 민족의 사업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민족혁명당원으로 구성된 제1지대는 약산과 황포군관학교 제4기 동기생이며 중국군 현역 대좌인 박효삼(朴孝三)이 지대장을 맡고 부구대장에 김세일, 왕통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제1분대장 최경수, 부분대장 장중광, 제2분대장 조열광, 부분대장 이해명, 제3분대장 엽홍덕, 부분대장 이지강 등 대원 42명으로 편성되었고, 전위동맹 소속원들로 구성된 제2지대는 성자분교 소대장이였던 이익성(李益星)이 지대장을 맡고 임평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부구대장 진원중, 제1분대장 이세영, 부분대장 장중진, 제2분대장 강진세, 부분대장 호철명, 제3분대장 이영신, 부분대장 한덕지 등 74명의 대원으로 편성되었다. 본부인 총대부는 총대장 김원봉, 기밀주임 신악, 총무조장 이집중, 정치조장 김규광(운암 김성숙), 학무조장 이집중, 지도원으로는 이춘암, 김성숙, 윤세주, 이영래, 주세민, 석성재, 김인철, 한지성, 진일평, 김석락, 유자명, 최창익이 추대되고 훈련소 주임은 약산이 겸임 하였다. 그 외 부녀봉사단 단장에는 약산의 부인 박차정이, 3.1소년단 단장은 당시 17세였던 최동선(崔東仙: 박차정의 사망이후 약산의 후처가 된 사람)이, 의무실 주임은 한금원이 맡았고, 편집위원에는 이두산이 임명되어 월간 잡지「조선의용대」, 반월간 잡지「조선의용대 통신」을 발간하게 되었다.(필자주: 중국인이면서 조선의용대 대원인 劉金鏞과 王繼賢이 조선의용대의 혈전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맡고 있었고, 이들은 조선의용대 성립 1주년을 기념하여 자료를 모아 혈전실기를 집필하였다) 이렇게 진용을 갖추므로 해서 오랜 항일투쟁으로 국내외에서 이름이 높았던 약산 김원봉은 조선인 항일부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되던 바로 그 시기에 일본군 25개 사단 약100만명의 병력이 중국 내륙의 거점 도시인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 등 소위 무한삼진지구를 향하여 물밀 듯이 쳐들어왔으므로 조선의용대는 창설 즉시 중국군과 함께 무한방어전(武漢防禦戰)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10여일 동안 참전한 무한방어전에서 의용대원들은 자기가 덮고 자던 흰 이불속을 뜯어 만화 표어 등을 써서 선전사업을 펼쳤고, 먹을 것이 없으면 의복까지 팔아서라도 하루에 한끼 정도 겨우 배를 채우면서 거리에서, 극장에서, 역전에서, 선전고무사업(宣傳鼓舞事業)을하여 무한 시민들에게 항일투쟁에 일어서라고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세(戰勢)가 극도로 악화되자 국민정부의 당, 정, 군, 요인들 마저 모두 무한을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는데, 무한이 함락되기 4일전인 1938년 10월 21일부터 조선의용대도 각 대별로 무한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조선의용대가 무한이 함락되는 순간까지 무한방어전에 참전했던 내용을 정치부 제3청장 곽말약(郭沫若)의 글 홍파곡(洪波曲)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마땅히 조선의용대 벗들에게 치사를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은 철수를 불과 며칠 앞둔 시각에 동원돼 이 일을 도맡았었다. 그들이 발벗고 나서 주었기에 한구 시내는 글자 그대로 ‘정신(精神)의 보루(堡壘)’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내 이 말은 결코 허풍을 떠는 게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후에 우리는 일본군 포로들의 공술에서 알게 됐는바 적들은 무한을 점령한 뒤 그 표어들 때문에 여간만 골치를 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옹근 사흘 동안 야단법석을 해서야 겨우 그 표어들을 다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에 써놓은 것을 말끔히 지워버렸다고 해서 머릿속에 들어박힌 것도 말끔히 가셨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동차로 거리를 돌아볼 때 그들은 표어를 쓰는데 열중해 여념들이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조를 묶어 페인트통, 콜타르통들을 들고 또 사다리들을 메고 촌분을 다투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감동시킨 일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나를 가장 참괴하게 만들어준 일막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의용대의 벗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단 한 명의 중국 사람도 끼여 있지 않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말을 아는 인재는 적지 않을 것이다. 일본 유학을 한 학생이 줄잡아도 몇십만 명은 될테지? 그런데도 무한이 함락의 운명에 직면한 이 위급한 시각에 우리를 대신해 대(對)적군 표어를 쓰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조선의 벗들뿐이라니! 그들은 망국의 처참한 아픔을 받고 있고, 중국에까지 유망해 와서 항일공작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오히려 자신들의 천직을 완수하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가 받은 매판교육이 중국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던 사실과 비교해 보면, 그들의 애국심은 알 수 없을 만큼 참으로 고상한 것이다. 때문에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친구들은 강탁과 하충한의 통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애국행동의 표현에 있어서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손정태 (밀양문화원 이사)

file0 File #1   |   img.jpg711.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불교신문]“日 독도영유권 주장 즉각 중단하라”
다음글 [미디어제주]상해 임시정부 국호 대한민국 대한제국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