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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기획연재-운허용하
관리자
조회수 : 2130   |   2008-07-20


운허스님 진영. 1978년 동국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당시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월운스님 운허(耘虛龍夏,1892~1980)스님의 평생 화두는 ‘독립.교육.역경.수행’이었다. 젊은 시절 조국 독립을 위해 나섰으며 학교를 설립해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교육불사는 출가수행자가 되어서도 일관되게 실천했다. 또한 역경(譯經)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우리 시대의 스승이었다. 운허스님의 삶과 수행을 월운스님(月雲, 남양주 봉선사 조실)과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 고흥택 전 광동고 교장의 증언과 비문을 참고해 정리했다. “남을 헐뜯지 말라…부처님 공덕만은 분명하다” 평생동안 ‘독립 교육 역경 수행’ 실천 80 고령에도 ‘큰방 공양’ 빠지지 않아 1972년 12월. 운허스님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이한상 전 불교신문 사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삼보사 낙성법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당시 미국행 비행기는 일본 우전(羽田)공항을 거쳐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휴식을 취했지만,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았던 일본 땅은 밟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운허스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다른이 전부가 하기(下機)하는데 나는 떼를 쓰고 내리지 않고 기내(機內)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내린댔자 공항 내(內)일 것이니 볼 것도 없을 것이고, 또 일본 땅을 밟기도 싫었다. KAL기가 우리나라 비행기인즉 기내에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 영역(領域)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조선을 강탈했던 일본에 대한 스님의 의지는 이처럼 강력했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일제강점기를 회고할 때면 일본인은 반드시 ‘왜놈’이라고 표현했다. 젊은시절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스님은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가 있었으며 관련 인사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해방후 인재양성을 위해 광동학교를 설립한 스님은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때 스님은 경교장에 머물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에게 도서관에 걸어 놓을 글씨를 부탁했다. 김구 선생이 써준 글씨는 ‘集腋成(집액성구)’였다. 이것은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나오는 말로 “여우의 겨드랑이 밑에 난 흰털을 모아 갖옷을 만든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어떤 일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945년 8월15일. 드디어 나라를 되찾았다. 당시 진접면에 살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광복 소식을 들은 스님은 마을로 달려와 농사일을 하고 있던 주민들에게 기쁨을 전했다고 한다. “이제, 광복이 되었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소”라며 마을 주민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스님은 생전에 “평생 가장 기뻤던 일은 8.15 해방이 되었을 때”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광복이 되고 얼마후. 스님은 봉선사 말사 스님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이날 스님은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우리가 할 일은 앞으로 조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라면서 “사찰과 스님들이 힘을 모아 학교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대중들은 모두 동의했고, 이렇게 하여 1946년 4월8일 문을 연 학교가 바로 광동학교였다. “시골에 학교를 세워 뭐하겠느냐”는 반대도 있었지만, 운허스님은 “우리가 이곳에 학교 문을 열지 않으면, 누가 이 시골의 아이들을 가르치겠느냐”면서 뜻을 관철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광동학교는 지금은 광동중과 광동고 등 모두 4개 학교로 늘어나 인재양성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정부가 수립됐다. 이날 스님은 젊은시절 함께 활동한 조선혁명당 동지 2명과 같이 봉선사 뒷산에 올랐다. 옛날 왕릉에 제사를 지내던 자리에 도착한 스님은 “우리가 당을 만들었던 것은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나라가 세워졌으니 당을 만들었던 목적은 완수됐다”면서 동지들과 함께 당의 해체를 하늘에 고(告)했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까지 사용하던 불천(不千)이라는 호를 불천(佛泉)으로 바꾸었다. 불천(不千)은 ‘不單千(불시단천) 億亦不畏(억역불외)’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왜놈) 1천명뿐 아니라 1억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는 뜻으로 조국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정부까지 수립됐으니 ‘호를 지은 의미’가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서 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불천이라는 음은 그대로 두고, 부처 불(佛)과 샘 천(泉)으로 한문을 바꾸기로 했다. ‘부처님의 샘’이라는 뜻이니, 출가사문으로 수행자의 삶을 사는 운허스님에게는 더없이 좋은 의미가 있는 호이다. 운허스님과 춘원 이광수는 6촌간으로 헤어진 뒤 금강산 유점사에서 만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춘원의 <금강산유기>에 실려있다. 이광수가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 봉근의 죽음으로 괴로워할 때 <법화경>을 소개해주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으며, 감명을 받은 춘원이 ‘법화행자’의 길을 걷도록 조력했다. “부처님의 공덕만은 분명하다.” 평소 과묵한 편이었던 운허스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아꼈다. 남을 비하하거나 비꼬는 일은 철저하게 경계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수행자의 첫 번째 자세라고 강조했다. 또한 시간을 쪼개 정좌한 후 경전 연찬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아침예불은 밤을 새운 후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등 몸소 모범을 보였다. 세수 80을 넘긴 고령에도 ‘큰방 공양’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건강을 염려한 다른 스님들이 “공양을 방으로 갔다드릴테니, 큰방에는 나오지 마시라”고 권했지만, 운허스님은 “기동을 못하게 되면 자연 안나간다”면서 사양했을 만큼 대중생활의 원칙을 지켰다. 운허스님의 유촉 / “사리를 주으려 말라” 운허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내 나이 80이니 언제 갈지 모르겠고 또 죽을때 여럿이 모여 얘기할 수 있을런지도 알 수 없는 것이라 오늘 이 기회에 몇 말씀 드리겠다”면서 유훈을 남겼다. 1972년 1월 9일 남긴 ‘다경실 유촉’으로 ‘지금의 한국불교’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문도장(門徒葬)으로 봉선사 화장장에서 다비(茶毘)하라. △화환(花環).만장(錦輓)을 사절하라. △습골시(拾骨時)에 사리(舍利)를 주으려 하지 말라. △대종사(大宗師)라 칭하지 말고 법사(法師)라고 쓰라. △사십구재도 간소(簡素)하게 하라. △소장(所藏)한 고려대장경, 한글대장경, 화엄경은 봉선사에 납부(納付)하라. △마음 죽이는 중노릇을 하지 말라. △문도간에 화목하고 파벌을 짓지 말라. 행장 / 조국독립운동 ‘헌신’ ‘불교사전’ 등 편찬 1892년 2월25일(음력) 평북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종빈(李鍾彬) 선생, 모친은 백천조씨(白川趙氏). 스님의 본명은 학수(學洙).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소년시절 한학을 공부하다 한일강제합방이 체결되자 고향을 떠나 평양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1912년 미국으로 가기위해 만주 안동현에 들렸다 동지들을 만나 환인현에 머물며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를 지냈다.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5년 봉천성에 흥동학교(興東學校)를, 1918년에는 배달학교(倍達學校)를 설립했다. 1919년에는 삼원포에서 ‘신한족(新漢族)’이란 독립군 기관지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흥사단에 가입했으며,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동지가 체포되어 경성을 탈출해 양양 봉일사에서 은신했다. 1921년 5월 경송(慶松)스님을 은사로 강원도 고성군 유점사에서 출가했다. 1924년 동래 범어사에서 사교를 이수했고, 1926년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개최했다.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1930년 9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6년에는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해방 후 경기도 교무원장이 됐고, 1946년 4월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불경 번역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이 됐다. 1961년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했고, 1978년 동국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18일 봉선사에서 89세 법납 59세로 입적했다. 봉선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45호/ 7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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