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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4월의 독립운동가에 운암 태허스님 선정
관리자
조회수 : 1788   |   2008-04-05


4월의 독립운동가에 운암 태허스님 선정 보훈처 “임정 국무위원 활동 등 큰 공훈” 올해로 탄생 110주년을 맞는 운암 김성숙(1898~1969, 태허스님)이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출가자였으며, 임시정부에서 국무의원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조국통일을 위해 혁신정당을 조직해 활동한 김성숙의 공훈을 기리고자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했다”고 밝혔다. 운암은 1989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에서 태어났다. 10대 때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한 그는 1918년부터 남양주 봉선사로 옮겨가 월초스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손병희, 만해스님 등과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운암은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양주.포천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그는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무산자동맹회 등에 참여했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운암은 1923년 초 베이징으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베이징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사회주의를 공부한다. 한편으로는 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고, 불교유학생회 소속 사회주의계열의 학생들과 고려유학생회를 결성해 비밀결사 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그는 칩거에 든다. 중국혁명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란 희망으로 중국의 사회주의에 앞장섰지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중국인 두준훼이와 결혼한 이후 문학 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을 전개했다. 운암이 항일민족운동 진영으로 돌아온 것은 1935년이다.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고 중국에서 한국독립을 위해 뛰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 그는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됐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를 대표해 비상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내 신탁통치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신탁을 두고 친소반미, 친미반소의 좌우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좌우대립을 지양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묻히고 말았다.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불렸던 그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구속돼 9개월간 형량을 살았다. 석방된 그는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통합야당인 신민당 운영위원과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숨졌다. 장례는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파주군 묘소에 묻혔다. 혁신인사로 낙인찍혀 옥고를 겪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공훈은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그가 죽은 지 13년 만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비로소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한편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해찬)는 오는 12일 오전11시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39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이날 봉선사 스님들의 집전으로 추모법회가 봉행되며, 식후에는 묘소참배가 진행된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416호/ 4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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