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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4월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태허스님)
관리자
조회수 : 1746   |   2008-04-01


▲남양주 봉선사 스님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신 운암 김성숙(태허스님)선생. 4월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태허스님) 스님출신의 유일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민성진 기자 스님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31일 스님출신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태허스님)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호:雲巖)은 밭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서간도로 망명하려다가, 경기도 양평의 풍곡신원 선사를 따라 용문사(龍門寺)에서 불교에 입문하고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김사국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1921년 봄 출옥 후에는 조선노동공제회․조선무산자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김한․조봉암 등과 교류하였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일제의 침략수뇌 암살단체인 의열단에서 선전부장으로 활약했으며, 재중국조선청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직접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1942년 임시정부 내무차장, 19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했고 광복 이후에는 좌우합작과 혁신정당에 몸담아 몽양 여운형과 근로인민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으로 좌우합작 운동을 펼쳤고 조봉암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성숙은 수차례 옥고를 치렀으며, 5.16 군사쿠테타 이후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르는 등 병고에 시달리다 1969년 서거했다. 정부는 1982년 김성숙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04년 국립묘지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됐다.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이해찬 회장은" 2008년은 선생이 탄신 110주년이 되는 해인만큼 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갈 것"이라며 "4월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계기로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과 공익정신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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