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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보]8월호- 독립운동을 위해 젊음을 불태운 운암 선생
관리자
조회수 : 2257   |   2007-08-13


2007.08월호 독립운동을 위해 젊음을 불태운 운암 선생 스님신분으로 중국에 건너가 항일운동 전개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독립투사였다.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온갖 고초를 겪은 민주투사로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불교계에서 태허(太虛)스님으로 알려져 있는 김성숙은 19세 때 용문사에서 출가했고, 25세 때 스님 신분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한 뒤 중국 각지를 돌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을 지내며 조국해방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혁신정당의 리더 격으로 활약해 정권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궁핍한 삶을 살다 1969년 4월 12일 향년 71세로 피우정(避雨亭)에서 생을 마쳤다. 당시 동아일보는 4월15일자에 "애국지사 고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 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라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내며 조국의 해방과 통일운동을 벌였고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나섰지만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현실에서는 그다지 조명 받지 못했다. 선생은 일제 초기 경기도 용문사 스님인 풍곡신원선사를 만나서 용문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 용문사에서 2년쯤 생활하다가 봉선사로 옮겨 불교교리를 공부했다.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손병희와 불교계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친분을 맺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같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민국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한다. 학생시절 장건상, 김봉환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을 조직했고,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사회운동의 분열을 막았다. 단재 신채호, 유우근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였다. 1926년 북경정부로부터 추방되어 광동으로 갔으며, 거기서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뮨 에도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문화 총동맹과 작가연맹에도 가입하여 중국공산당 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한편 1936년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동맹,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하면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그 후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6.25때 서울에 남았다가 공산당 부역 혐의로 옥고를 치렀고, 1955년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했다. 5.16 이후에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운암의 일생은 젊어서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일관했고, 해방 후에는 반이승만 정권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다. 만년에는 가난과 궁핍으로 말미암아 크게 고통 받았는데, 친지들의 주선으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는 "피우정(避雨亭)"이라 불렀다.(봉선사의 피우정은 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198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운암선생의 일생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용기 있게 대항하는 정의감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조국애,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헌신적 노력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운암 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는 "혁신적 양심세력"으로 민족을 위해 살다 간 운암선생의 삶과 정신을 오늘에 계승 발전시켜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삶고, 나아가 우리 민족의 통일과 바람직한 민족 문화형성에 기여하고 설립됐다. 글 조경렬 기자 / 사진 운암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 인터뷰> - 운암 김성숙 선생에 대한 연보와 항일운동의 업적은? =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사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분이 운암 김성숙 선생이십니다. 1898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서 기미년에 옥고를 치르신 후에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조선민족해방 동맹을 조직하기도 하시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단체들을 통합해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가 다시 모든 단체들을 임시정부로 총 단결하여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을 지내셨고 48세 때에 해방을 맞이하셨죠. - 사업회의 설립취지와 사업내용은? = 운암 김성숙 선생은 민족독립운동가로서 일제강점기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시고 광복 후에는 민족,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청빈한 삶을 사셨던 애국지사입니다. 누구든 국가에 충성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면 그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선양해야 한다는 것을 현세와 후대에 보여주기 위하여 운암 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는 출범 되었습니다. 2005년 준비위원회 구성을 시작으로 운암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 결성이 추진되었으며, 2006년 정부기관인 국가보훈처 산하 사단법인체로 등재 되었습니다. 주요사업으로는 국내외 독립운동 사적 발굴 및 공원조성 사업, 김성숙선생 사상연구, 운암 테마파크 건립사업, 대학생 "중국 항일 사적지 탐방단" 사업 등을 펼치고 있습니다. - 오는 8월 1일에 개최되는 운암선생 항일운동 학술회의 취지와 목적은? = 우선 운암 선생에 관한 세간에 오해나 잘못된 현대사관을 올바르게 기록하자는 것이 이번 학술토론회의 취지이고, 나아가서 항일운동사의 정확한 이해라는 커다란 목적이 있습니다. 이번 학술토론회의 핵심은 중국 중산대학 교수님을 초빙해 양국간 학자들 간의 학술발표와 토론을 통하여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근현대사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 최근 운암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저희가 중산대과 비즈니스를 시작한 동기부터 말씀드릴게요. 운암선생과 부인이신 두군혜 여사가 중산대학을 졸업했고 중산대학의 건립자인 손문과 운암선생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 이 사업의 계기입니다. 현재 3차에 걸친 공식 협상과 다수의 비공식 서신 교환이 있었고 중산대학에서는 건립에 다른 인.허가 사항과 중국 본정부와 조율을 끝낸 상황이고 저희 사업회에서는 국가보훈처 및 외교통상부가 각 부처와 조율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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