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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중국 내 우리 항일유적지 대부분 헐릴 위기
관리자
조회수 : 2255   |   2007-08-13


중국 내 우리 항일유적지 대부분 헐릴 위기 탐방단 중경 임시정부 청사, 오사야항 청사 등 돌아 잡초가 무성해 보기조차 쓸쓸한 공터, 세월의 흔적을 견디다 못해 곧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목조건물. 이것이 중국 중경(重慶, 총칭)직할시의 우리 독립운동 유적 모습이다. 8월 12일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 ‘제2회 항일운동 사적지 탐방단(이하 탐방단)’의 활동은 중경에서 이어졌다. 현재 가장 잘 보존된 건물은 중경 연화지(蓮花池)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다. 이곳은 1940년 임시정부가 입주했던 마지막 청사로 지난 2000년 중경시 지정 문화재 63-85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입구에는 김구 선생의 동상과 함께 커다란 임시정부 태극기가 걸려있다. 중경에서의 운암 김성숙 선생(법호 태허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니 중경 당항관에서 입수한 자료가 눈에 띈다. 운암 선생과 부인 두군혜 여사, 그리고 그 아들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호적조사 자료에 남아있다. 운암 선생은 1941년부터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운암 선생의 참여는 김원봉 유자명의 참여로 이어졌고, 이는 곧 임시정부의 든든한 배경이 됐다. 이 시기 좌파계열이었던 운암 선생은 “임시정부 사람들과 당을 함께 할 수는 없어도 정부를 같이 할 수는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만큼 운암 선생에게는 조국의 광복이 개인의 이념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중경 임시정부 청사처럼 잘 남아있는 유적지는 우리 가슴을 뿌듯하게 해주지만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를 저술한 오사야항 임시정부 청사에는 퇴락한 목조건물의 쓸쓸함이 가득하다. 연화지로 가기 전에 입주했던 오사야항 청사에는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만 남아 그곳이 우리 항일운동 유적지임을 보여준다. 또한 1940년 8월 창시된 광복군이 서안으로 총사령부를 이전하기 전에 총사령부로 쓰였던 중경 터는 현재 ‘미원’이라는 음식점이며 중경시 음식서비스주식회사 소유 건물이다. 그나마 음식점 2, 3층에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방치된 흔적만 볼 수 있다. 건물이 감싸고 있는 광복군 훈련장 터도 이제는 잡초밭일 따름이다. 중경시 개발계획의 한 가운데 있는 이 건물은 곧 수명이 다해 헐릴 것으로 보인다. 이날 운암 선생이 중경에서 직접 거주한 터도 찾았다. 대불단(도로이름) 57호에서 거주한 운암 선생의 흔적을 찾았으나 현재 그 자리에는 신발가게가 운영 중이었다. 이제 세월은 흘렀다. 당시 그렇게 열망하던 대한민국의 독립도 올해로 62주년이다. 목숨과 바꿔 후손에게 자유를 남겨준 이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과제다. 한편 탐방단은 13일 북경으로 출발해, 독립유공자 후손과의 만남과 북경대 학생들과의 한ㆍ중 문화토론을 준비한다. 중국 중경/글ㆍ사진=김강진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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