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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운암 김성숙 기념학술대회 개최
관리자
조회수 : 2231   |   2007-08-01


님 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금강산 의 붉은 승려"의 실제 모델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민족지도자 운암 김성숙( 1898-1969)의 삶을 되돌아보는 학술대회가 1일 동국대 원흥관에서 열렸다.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최장 최문성)가 주최한 학술대회에는 국민대 손염홍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 편사연구사, 한상도 건국대 교수 등이 참석해 1920∼ 1940년대 운암의 항일독립운동을 10년 단위로 나눠 조명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펼친 운암의 사회주의운동은 손염홍 교수가 고찰했다. 운암 은 이 시기에 민국대학과 중산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으며 학생운동과 의열단 운동 등에 참여했다. 손 교수는 "1920년대 운암은 이론적 소양을 갖추고 각 국의 혁명가와 교류했다" 며 "이 시기의 활동을 통해 운암은 훗날 민족운동의 협동전선을 형성하는 인적 기반 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김광재 연구사는 1930년대의 항일운동을 조명했다. 운암은 1927년 중국공산당원 으로 광주봉기에 참여했다 실패를 맛봤으며 이후 1934년까지 중국공산당이나 한인독 립운동진영과 거리를 두고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김 연구사는 "운암은 이 시기를 통해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 을 모색했다"며 "이후 계급혁명보다 민족혁명을 우선하는 이른바 "민족적 공산주의 자"들을 결집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는 1940년대 김성숙이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해 벌인 활동과 정치사상을 검토했다. 김성숙은 1940년대 초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과 선전부 선전위 원, 국무위원 등을 맡았다. 당시 김성숙은 "맹렬한 반소(反蘇)활동을 벌여 소련이 임정에 적대적으로 돌변 하는 화를 자초했다"며 이승만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의 외교활동을 탄핵했다. 이는 광복 후 김성숙이 집권세력의 견제와 핍박을 받는 이유가 됐다. 한상도 교수는 이를 두고 "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전망과 예견이 "기회주의자", "진짜 빨갱이"라는 낙인에 쓰러졌다"며 "그것은 김성숙 한 사람의 고뇌에 국한된 사 실이 아니고 진보적 민족주의노선의 파탄을 의미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김상기 한국근현대사학회장, 김국주 광복회 회장, 이동춘 서울지방보훈청장 등이 참석해 축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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