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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줌] 운암 김성숙 선생 생애
관리자
조회수 : 2281   |   2007-06-27


임시정부 국무위원 활동 "좌익" 이유로 별세 13년후 건국 훈장 운암 김성숙 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조국광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고 해방후에는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사상과 지조로써 살다간 애국지사이다. 선생은 1898년 평북 철산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태어나 18세 때인 1916년 봄 만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혀 국경을 넘지 못하게 되자 곧바로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로 들어가 승려가 됐다. 이후 선생은 3·1운동이 있던 1919년 4월 양주군 광천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이후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했다. 운암은 중산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베이징, 광둥, 상하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조선민족해방 동맹을 조직하기도 했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모든 단체들을 임시정부로 집결시키다가 48세에 해방을 맞았다. 선생은 님 웨일즈가 쓴 항일운동가 김산의 전기인 ‘아리랑’이 국내에 번역·소개되면서 본명보다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으로 더 잘 알려졌다. 좌우합작의 시대였던 1940년대 들어 좌파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그는 임정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을 역임했음에도 좌파 출신의 혁신계 인사라는 이유로 광복조국으로부터는 감시와 탄압만 받았을 뿐 해방 이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집 한칸 제대로 없던 그는 눈을 감기 3년 전에야 동지·후배들이 지어준 건평 11평의 집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기관지염을 앓던 선생은 1969년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러나 혁신계에 몸담았던 전력 탓에 사후 13년 지난 1982년에야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신상윤기자 작성자 : 신상윤 / 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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