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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19. 봉선사 강원에서 사집과 공부 시작
관리자
조회수 : 2351   |   2007-06-13


[운암 김성숙]19. 봉선사 강원에서 사집과 공부 시작 [크게][작게] 기사등록일 [2007년 06월 13일 수요일] 월초 화상이 엄격히 교육 22년에 무산자동맹 가입 월초 화상을 만나 불경공부를 계속하겠다고 약속한 성숙은 1920년 5월부터 봉선사 강원에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미 투옥되기 전에 치문반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사집과 과정부터 공부할 수 있었다. 한국불교는 선승들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강원에서도 불교의 진수, 특히 간화선의 골수가 담겨 있다고 하는 중국 송나라 때 대혜종고 선사가 지은 『서장』을 비롯해 『선요』,『도서』,『절요』등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2년 과정의 사집과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한 성숙이 월초 화상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후로도 사교과와 대교과 공부를 해야만 했다. 풍곡신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지만, 지금 성숙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은 월초 화상이었다. 그러니 그 앞에서 한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월초 스님은 공부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엄격하게 대했다. 사찰 대중들의 자급자족을 위해 봉선사 토지를 늘리는데도 노력했던 화상은 강사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순찰하듯 학인들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20여 명의 학승들이 큰 방 하나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탈행위는 곧 드러나게 돼 있었고, 허락 없이 절 밖 출입을 한 대중들은 거구인 화상을 업고 마당을 50바퀴나 도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가 화상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중들 앞에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화상이 불음주계를 파계한 학승들에게 내리는 벌은 특별했다. 먼저 세수를 시키고 물이 마르기 전에 재가 가득 담긴 삼태기를 입으로 힘껏 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재가 얼굴에 달라붙어 고생한 학승이 또다시 술을 마시러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성숙은 그렇게 월초 화상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강원 사집과 공부를 하면서, 다른 대중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사회주의 공부를 병행했다. 김사국을 통해 알게 된 사회주의 서적을 보는 것으로 공부를 했고, 가끔씩 월초 화상의 허락을 얻어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성숙이 옥고를 치르고 출옥할 당시에 만들어진 조선노동공제회를 비롯해 1920년 12월 발족된 조선청년회연합회 등은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단체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각 단체마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가 혼재돼 있었고, 서로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갈등을 빚는 등 어지러운 시기였다. 성숙은 이때까지 특별하게 어떤 단체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우선은 스님으로서 해야할 공부에 열중했던 성숙은 가끔씩 사회주의운동가들과의 만남을 갖다가 1922년에 만들어진 무산자동맹회에 처음으로 가담했다. 그리고 이어서 장동희가 회장으로 있던 조선노동공제회에도 가담해 몇 년 사이에 물밀 듯이 밀려든 사회주의사상과 공산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성숙은 이때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으로 이들 단체에 가입했었다. 하지만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 가입은 결국 성숙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무산자동맹회는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상설 사회주의 운동단체였다. 국내 언론기관이나 청년회 그리고 노동단체에서 신사상운동을 펼쳤던 이론가들이 주축이었으니, 그 속에서 이론을 배우고 사상적 무장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sjs88@beopbo.com 904호 [200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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