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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레신문]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14)
관리자
조회수 : 2703   |   2007-06-13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41] (1990. 9.27. 한겨레신문 연재. 최영선 글) 민족통일전선 주창 진보적 민족주의자 김성숙(1898~1969) “조국광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사상과 지조로써 살고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1898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기미년에 옥고를 치른 뒤 사회운동에 가담했다가 마침내 26세 때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산대학정치학과를 미치고 베이징, 광둥, 상하이 등지에서 혁명단체의 기관지들을 편집했으며 광복운동의 일선에 나서서 조선민족해방 동맹을 조직하기도 하고 뒤에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여러 혁명단체들을 통합,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가 다시 모든 단체들을 임시정부로 총단결하여 국무위원이 되어 해방을 만나니 48세였다.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갖은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는 추호도 굽힘없이 살다가 1969년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지냈다.”(김성숙의 ‘묘비문’) <26살에 중국으로 망명> 님 웨일즈가 쓴 한 항일운동가(김산·본명 장지락)의 전기인 <아리랑>이 국내에 번역·소개되면서 본명보다는‘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김충창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 그의 묘비문에서도 읽을 수 있듯 그는 일제 때는 멀리 중국땅에서, 해방 뒤에는 분단된 조국의 한 모퉁이에서 항일투쟁·좌우합작·혁신운동을 위해 파란만장한 사람을 살다가 혁신계 인사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가난과 병고 속에 생을 마감했다. 좌우합작의 시대였던 40년대 들어 좌파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그는 임정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면서도 좌파 출신의 혁신계 인사라하여 임정의 법통을 내세우는 광복조국으로부터는 감시와 탄압만 받았을 뿐 살아서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또 숱한 인물들이 받은 건국공로 훈장도 광복 37년 후,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1982년에야 주어졌다. 구한말 격동기인 1898년 3월 10일 평북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태어나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본격적으로 혁명운동과 독립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김성숙의 일생은 △18세에 승려가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 진보적 사상을 닦은 시기 △1923년 망명 이후 43년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의 혁명운동과 문필활동 시기 △임정 참여를 전후해서부터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족통일전선운동 시기 △전쟁 이후의 이승만정권에서부터 5·16쿠데타를 맞기까지의 혁신운동 시기 △이후 정권교체를 위해 보수야당에 참여해 생을 마치기까지 시기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활동공간과 성격에 따라 이런 구분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사상적 바탕은 통일된 자주독립조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였다. 특히 좌우합작 운동의 일환으로 임서정부에 참여한 이후 그는 그 방법이 좌우파 민족주의자들 합작을 위한 연합전선이라는 믿음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또 일제 때는 중국에서 해방공간에서 좌파에 가담했으면서도 한번도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김성숙은 10살 때인 1908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고향에 세워진 대한독립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 뒤 한일합방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할아버지가 차린 글방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그러던 그는 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 등에 관한 소문을 듣고 쑨원과 레닌 등 혁명가들에게 빠져 있던 무렵 때마침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잠시 고향에 들른 집안 아저씨가 들려준 독립군의 활동상을 듣고 만주망명을 결심했다. 18세 때인 1916년 봄 만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쳐 국경을 넘지 못하게 되자 그는 곧바로 경가도 양평의 용문사로 들어가 중이 됐다. 용문사에서 2년 반쯤 승려생활을 한 그는 경기도 양주군 광릉의 봉선사로 옮겨 정식으로 불경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비로소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했던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봉선사의 노승 월초 밑에 있으면서 월초와 절친하게 지내던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등 3·1운동의 중심인물들을 만나고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한용운의 지도 아래 3·1운동에 뛰어든 김성숙은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에 참여했고 경기도 포천과 양주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제작·배포했다. <독립선언서 배포....옥살이> 4월 양주군 광천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이 과정에서 사상적 기반을 닦은 김성숙은 출옥후 사회운동단체의 효시적인 조선무산자연연맹 등에 가입, 활동하다가 1923년 더욱 자유로운 혁명활동을 위해 다른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그는 이때부터 승복을 벗어던지고 혁명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베이징 국민대학과 광동 중산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한편 혁명활동을 통해 리다자오(이대교), 저우언라이(주은래) 등 중국 혁명가들과 교분을 넓힌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1924년 장건상, 장지락 등과 함께 당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종파적 분열과 대립을 극복한다는 목표 아래‘창일당’을 조직, 그 기관지 <혁명>의 주필을 맡았으며 조선의열단에 가입, 선전부장을 맡았다. 1927년 중산대학을 졸업한 그는 그해 12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이 장제스의 반혁명 쿠데타로 붕괴되면서 발생한 광둥인민폭동에 참가, 장지락 등과 함께 시가전을 지도했다. 광동코뮨이 실패한 뒤 상해로 피신한 그는 다시 송암항일전쟁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10년 가까운 기간 직접적인 혁명운동에 나서지 않고 중국 반제국주의동맹의 간부로 기관지 <봉화> <반일민족>을 편집하거나 광시성 성립사범대학 교수를 지내는 등으로 문필·저술활동에 진력했다. 그러던 그가 항일독립운동 일선에 다시 뛰어든 것은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국공합작이 시작되던 1936년부터이다. 그는 이 무렵 박건웅, 김재호 등 진보적 항일운동가들을 규합,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유우근의 조선혁명자연맹,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연합, 조선민족전선연맹(약칭 민선)을 발간했다. 그 뒤‘민선’은 국민당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는데 그는 조선의용대의 정치부주임으로 선출돼 기관지 <의용대통신>을 맡아 간행했다. 한편‘민선’의 결성에 조금 앞서 민족진영 우파들은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등이 주축이 돼 한국광복전선(약칭 광선)을 결성했는데 대립적인 입장에 있던 이들 두 연합체는 1940년 무렵부터 임시정부로의 발전적 해소를 모색하게 된다. <43년 임정 국무위원 취임> 이 과정에서 김성숙은 임정으로의 총단결을 주장, 김원봉과 대립했는데 조선의용대의 상당수가 화북의 조선독립동맹으로 가버리자 김원봉도 김성숙을 따라 1942년 임정에 합류하게 된다. 김성숙은 그해 임정내무차관으로 선출됐으며 43년‘민선’과‘광선’이 해체를 선언하고 임정으로 공식 흡수되면서 장건상, 유림 등과 함께 국무위원이 됐다. 이때 김성숙의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오던 시점에서 연합국으로부터 교전단체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던 임정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4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연합국회의에 업저버로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초 임정 외교부장이던 조소앙이 사절단장으로 내정됐으나 시간 사정 등으로 참석치 못하게 되자 미국에 있던 부단장 이승만이 단장을 맡아 회의에 나가게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회의에서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국을 팔아먹었다는 내용의 반소전단을 만들어 뿌리는 등 임정이 연합국의 승인을 얻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반소활동만을 벌여 소련 대표들의 분노를 샀다는 것이다. <임정 확대개편론 주창> 이 소식을 중국 대표단의 동필무로부터 전해들은 김성숙은 이승만의 반소행동이 임정의 외교적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데 격분, 김구 주석에게 즉각 국무위원회 소집을 요구했다. 그는 국무위원회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에서 즉각 면직시킬 것과 임정개혁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회의는 이승만의 인책을 다수표결로 채택했으나 임정개혁안은 장시간 논란 끝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이에 분개, 한때 국무위원사퇴서를 제출하고 잠적하기도 했지만 조소앙 등의 설득으로 그해 8월초 임정으로 복귀, 환국문제를 논의했다. 환국에 앞서 열린 마지막 국무위원회에서도 김성숙은 임정의 확대 개편론을 주장 △국내에서의 극좌·극우 대립항쟁 사태에 대해 임정은 편향됨이 없이 양파의 대립을 해소하고 다같이 포섭하도록 노력할 것 △입국 즉시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와 반일인사들을 소집, 임정을 확대 ·개선함으로써 한국 민주정부를 재조직할 것 △미·소애 대해 평등한 원칙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 등 세 방향(이른바 입국전 약법3장)을 제시해 채택케 했다. 45년12월 조소앙·장건상·신익희·홍진 등과 함께 제2진으로 환국한 그는 경교장에서 열린 제1차 국무위원회에서 약법3장의 실행을 다시 촉구, 좌우 각 정당대표자들로 비상정치회의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비상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로 하는 결의가 다수결로 채택됐다. 이렇게 하여 김원봉·장건상 등과 함께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위한 임정쪽 기구인 특별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김성숙은 활발한 막후접촉을 벌여 한민당·국민당·인민당·공산당이 참여한 가운데 4정당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정국을 뒤흔들던 신탁통치문제가 여기서도 논란이 돼 46년 1월16일까지 네차례 열렸던 이 모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임정쪽은 좌익을 제외한 채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를 강행했고 1월 12일 여기에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가 합류하면서 비상정치회의의 우익편향은 더욱 노골화돼 갔다. 김성숙은 사태가 이처럼 못마땅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1월 23일 김원봉, 성주식과 함께 장문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주비회를 탈퇴했다. 그는 이 공동성명에서“임정은 입국 당시 통일전선정책을 특히 강조했으며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좌우 양 진영의 편향을 극복하면서 단결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우익으로 편행했다”면서“이로써 임정은 전 민족의 영도적 입장, 특히 좌우 양익에 대한 지도적 지위를 포기케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을 급속히 결성하기 위해’각 당파들에 △비상정치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즉시 통일해 좌우 양익이 공동으로 주비할 것 △친소반미 또는 친미반소 경향을 철저히 극복, 친미·친소의 평행정책을 수립, 견지할 것 △암살·구타·파괴 등 파쇼적 테러를 철저히 근절·배격할 것 △매국적 민족반역자와 친일분자는 통일전선에서 배제시킬 것 등 4가지 당면대책을 촉구했다. 김성숙은 그 뒤 비상국민회의가 미 군정청의 자문기관인‘재 남조선 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으로 변신하자“이는 임정의 기치 아래 투쟁하다 숨진 동지들의 영령에 대한 철면피한 배신”이라며 임정의 해산을 촉구하고 임정과 완전히 결별했다. 임정과 결별한 김성숙은 뜻을 같이하던 장건상·김원봉·성주식과 함께 비상국민회의에 대항,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조선독립동맹) 등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해 민전의 문호 개방 및 우익 당대표들과의 합작노력을 전제로 부의장에 선출됐다. 민전 부의장이 된 그는 남한 각지를 돌며 미군정과 민주의원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다가 그해 3월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6개월 동안 구금됐으며, 그해 9율 석방돼 당시 여운형·김규식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좌우합작에 참여하는 한편 좌편향으로 흐르던 민전의 의장단을 사퇴했다. 좌우합작운동마저 실패로 끝나가자 그는 여운형을 따라 근로인민당(근민당) 결성에 참여, 조직국장을 맡았으나 두달도 채 안돼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근민당도 유아무야되고 말았다. 김규식을 도와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5·10선거에 불참했던 그는 50년 5·30선거에는 경기도 고양군에서 입후보했으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50년 고양 입후보 낙선> 곧이어 일어난 6·25전쟁에서 남북 양쪽으로부터 고난을 겪은 뒤 정치활동을 멈췄던 김성숙이 혁신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55년. 조봉암·서상일 등이 혁신계 정당 창당을 위해 모인 광릉회합에 참여하면 다시 정당운동에 가담한 그는 진보당추진위에도 관계했으나 혁신계가 단일정당으로 단결하지 못하고 진보당(조봉암)과 민주혁신당(서상일)으로 나뉘면서 이동화·신숙 등과 함께 민주혁신당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그는‘혁신세력 통일주비회’를 발족시키는 등 혁신세력의 대동단결에 힘썼는데 혁신계의 움직임이 이처럼 활발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두차례의 철퇴를 가했다. 진보당 사건에 앞서 57년 11월 첫 번째로 내려진 철퇴인‘근로인만당 재건사건’의 총책 혐의로 김성숙은 동지 20명과 함께 구속됐으나 이듬해 전원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두차례의 대탄압을 겪은 혁신계가 4월혁명으로 소생하면서 김성숙은 혁신운동에 나서 한동안의 이합집산을 거쳐 다시 묶여진 혁신우파인 통일사회당에서 정치위원으로 뽑혔다. 61년 2월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에서는 의장단의 일원으로 혁신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4개월 뒤 일어난 5·16 쿠데타는 혁신계에 찬서리를 내려 김성숙은 서상일·정화암·이종화·윤길중 등과 함께‘통일사회당사건’의 피고로 법정에 서야했다. 그는 이 사건에서 9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됐으나 이를 계기로 혁신계를 떠났다. 그리고 66년 선명야당의 기치를 든 보수야당인 신한당에 참여했다. 윤길중 등이 그와 행동을 같이 했는데 이때는 박정권의 출범 초기로 혁신운동에 앞서 군사정권의 교체가 더 시급하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한당에 참여한 그는 그뒤 통합야당인 신민당에서 운영위원, 지도위원으로 있으면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집 한칸 제대로 못 간추고 셋집을 전전하던 그는 눈을 감기 3년 전에야 혁신계 인사였던 구익균(통사당 재정부장)의 집마당 한모퉁이에 동지·후배들이 지어준 건평 11평의 집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비나피하도록’마련해 준 것으로 그 집문엔‘피우정’이란 목각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한다. 그러나 피우정으로 옮겨 앉을 무렵부터 기관지염을 앓았던 그는 병원 한번 제대로 못가고 4월12일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70평생을 온몸으로 살았던 체험들을 하나의 기록으로도 남기지 못했다. 그에 대한 예우는 그가 죽고 나서야 다소 베풀어져 정부와 여·야당은 이틀 후인 14일 그를 경기도 파주 장곡리 서울시립공원묘지에 사회장으로 모시기로 하고 정부·공화당·신민당이 1백만원씩을 장례비용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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