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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운암김성숙]-3. 독립학교에서 독립군 꿈을 키우다
관리자
조회수 : 2351   |   2007-01-22
3. 독립학교에서 독립군 꿈을 키우다
 

열살때 대한독립학교 입학
“안창호처럼 되겠다” 다짐
할아버지에게 효사상 익혀

성숙이 들어간 대한독립학교에서는 목총을 메고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가 크고 몸집이 좋았던 성숙은 옷을 화려하게 입고 전체 학생들이 선 대열의 제일 앞에 서서 나팔을 부는 나팔수를 했다. 학생들은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재미있어 군사훈련 시간만 되면 서로 제가 더 잘한다고 뽐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군사훈련의 재미에만 빠져 있을 때, 성숙은 “우리는 꼭 나라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숙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을 할 때 단순하게 총을 다루는 훈련만 시켰던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융희황제(隆熙皇帝) 부강만천하(富强萬天下), 국민교육 보급함이 전제함일세. 우리들은 덕(德)을 받고 지(知)를 발하여 현명한 선구자가 되어봅시다….”로 시작하는 노래를 가르치며, 학생들 스스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정신교육을 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행진을 할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고 장구를 치며 나팔을 불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나라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었다. 때문에 우선 학생들의 정신교육을 올바로 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동량으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했고, 따라서 학교교육은 단순한 군사훈련과 교과 교육에만 그치지 않았다.

성숙은 이런 선생님들에게 “우리의 나라는 이미 망했다. 왜놈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통감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이건 독립국가의 자주권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꼭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독립을 찾아야 한다”는 선생님들의 결의에 찬 말은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어린 성숙의 가슴에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이는 물결처럼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토록 독립을 강조하는 선생님들이었기에 먹고사는 문제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고, 월사금이 없어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까지 모두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밤에는 야학을 열어서 나이 많은 장정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역시 나라 빼앗긴 설움을 이야기하고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선생님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들으며 제 할 일을 고민하던 성숙은 이때 도산 안창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립운동에 나서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일찍이 민족문제에 눈을 뜬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힌 후에 일본을 거쳐 귀국해서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으며, 뛰어난 웅변술로 많은 동포들에게 애국심과 민족혼을 불어넣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 이유로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안창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성숙은 “나도 빨리 자라서 안창호 같은 인물이 되리라”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교과서를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위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같은 선열들의 활약상을 배우기도 했다. 평양에서 독립국가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는 안창호는 물론 교과서에서 배운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같은 위인들의 삶은 어린 성숙이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크나큰 자극제가 되었다.

성숙은 그렇게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독립운동의 싹을 키워 가는 한편으로 집에서는 어른들에게 충효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정의롭게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가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러나 성숙이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만들어주었던 대한독립학교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완전하게 나라를 잃은 국민들이 당하는 설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국민들의 의식교육에 앞장섰던 대한독립학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일본인들은 학교 문을 닫게 하고, 대신해서 오늘날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를 세웠다. 대한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일본인들에 의해 보통학교가 세워지자 유달리 민족의식이 강했던 할아버지는 “더 이상 그 학교에 다니지 말 것”을 명하고는 당신이 차린 글방에서 다시 한문을 배우게 했다.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은 후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성숙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잠시 고향에 들른 집안 삼촌을 만나게 됐다. 

sjs88@beopbo.com 


886호 [2007-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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