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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부친은 자상하고 열정적인 개혁가 해방 후 한국서의 삶이 진짜 고난”
관리자
조회수 : 2919   |   2006-08-22


“부친은 자상하고 열정적인 개혁가 해방 후 한국서의 삶이 진짜 고난” 베이징에서 만난 운암-김산 후손들의 소회 ‘운암 김성숙 항일운동 사적지 탐방단’이 마지막 일정으로 찾은 중국 베이징에서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두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과 김충창(본명 김성숙·태허 스님)의 자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김성숙이 중국에서 결혼한 중국인 여성 두쥔후이(杜君慧)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3남 가운데 둘째 두젠(71) 씨와 셋째 두롄(61) 씨, 한국에서 온 장손 김덕천(67) 씨, 그리고 김성숙을 정신적 스승으로 섬겼던 김산의 아들 고영광(69) 씨 등 한국과 중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두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탐방단을 격려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부친과 자신들의 삶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사진〉 자신의 나이 12살 때 아버지 김성숙과 헤어졌다는 두젠 씨는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 땅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시련을 겪었던 아버지가 귀국 후에 항일운동을 할 때보다 더 어렵게 살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웠다”며 “아버지에게 있어서 진정한 시련과 고난은 해방 후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의 삶이었던 것 같다”고 고난의 연속이었던 부친의 삶을 회고했다. 두젠 씨는 또 “아버지는 매일 늦은 밤 시간까지 일을 하시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연날리기와 수영을 가르쳐 줄 정도로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아셨던 분”이라고 부친의 자상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모습을 전했다. 인터뷰 내내 한국에서 온 조카 김덕천 씨의 손을 꼭 잡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두젠 씨는 “아버지가 말해줘서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부친과 함께 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둘째 두젠 씨와 함께 인터뷰에 응한 셋째 두롄 씨는 “한국에서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회가 생기고, 부친의 개혁에 대한 정신을 조명하고 이어가는 일을 한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며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종 말을 아끼던 두롄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버지의 사상을 조명하는 기념사업회의 일을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내겐 정신적 부유를 안겨준 일이었다”며 “많은 한국인들이 기념사업회의 일에 참여해 뜻을 모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국 내에서의 관심을 당부했다. 김성숙의 두 아들과 함께 자리한 김산의 아들 고영광 씨는 “아버지가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부양을 부탁했는데, 그때부터 키워주신 분의 성을 따라 고 씨 성을 쓰고 있다”고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또 다른 비애를 전했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기자의 말에 고 씨는 “아버지는 나처럼 오래 살지는 못했다”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김산은 고 씨가 태어난 이듬해에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됐다. 따라서 고 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상태였다. 고 씨는 “후일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훌륭한 항일운동가인 아버지가 중국과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고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유난히 검은 피부를 가진 고 씨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그저 “괜찮았다”며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자손이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살아가면서 어찌 굴곡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김성숙의 두 아들과 김산의 아들 모두는 “별 문제 없었다”며 “이렇게 그분들의 활동을 기억하고 찾아준 학생들에게 감사한다”는 말로 깊이 맺혔을 수많은 감정표현을 대신했다. 베이징=심정섭 기자 법보신문 865호 [200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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