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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애국선열 고난의 흔적들 사라져 안타까워”
관리자
조회수 : 2684   |   2006-08-21

태허스님 관련 중국 항일유적지 답사 上

“애국선열 고난의 흔적들 사라져 안타까워”


전국 30여개 대학생 50여명 주요도시 1만 km 장정
도시개발 여파로 유적지 폐허…“옛 모습 간데 없어”

1937년 태허스님을 중심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활동했던 건물. 후베이성(湖北城) 우한시(武漢市)에 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 등 전국 30여개 대학 51명의 학생들은 지난 10일 우한의 유적지를 방문 태허스님 등을 비롯해 항일투쟁을 펼쳤던 투사들의 발자취를 되짚었다.



광복 61주년을 맞아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 등 전국 30여개 대학 51명의 학생들은 독립운동가인 운암 김성숙으로 알려진 태허스님의 항일 유적지를 순례하기 위해 지난 7일부터 15일까지 중국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난징(南京), 우한(武漢), 광저우(廣州), 충칭(重慶), 베이징(北京) 등을 탐방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숱한 좌절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독립과 해방을 염원했던 태허스님과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면서 그 열정과 조국애를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탐방은 임시정부청사, 홍구공원을 거쳐, 난징에서는 난징대학과 대한민국 임시대표단이 머물던 주화대표단, 우한에서는 조선민족전선연맹 거점지와 중앙군사학교 무한분교를 방문했다. 광저우에서는 중산대학, 황포군관학교, 충징에서는 광복군 총사령부 옛터, 임시정부청사 등 주요 항일 유적 현장을 직접 찾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항일 유적지는 매일 수천 명의 탐방객이 찾는 상하이의 임시정부 청사와 홍구공원 안에 자리 잡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해 한중 정부가 만든 기념관 ‘매정(梅亭)’을 제외하고는 옛 자취를 찾기가 어려웠다. 개발로 인해 이미 사라졌거나, 상가나 아파트로 변해 있었다. 현장에는 항일 유적을 기리는 기념비조차 없어 핍박받던 조국을 위해 생사의 기로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옛 독립투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또한 사람의 왕래가 없어 폐가로 변해버린 곳도 있었다.

탐방단의 첫 방문지는 송경령능원이었다. 만국공묘(萬國公墓)였던 송경령능원은 외국인 공동묘지다.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윤현진, 오영선 스님의 유해가 묻혔던 곳으로 유해는 1993년과 1995년 각각 봉환된 곳이다. 묘지 자리의 표석에는 ‘이장(移葬)’이란 글귀가 남아 있어 본국으로 이전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석 바로 옆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추정되는 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CHAO SANG SUP’로 표기돼 조상섭의 묘로 추정되는 표석과 ‘L.Y.KIM’으로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표석이 남아 있었다.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독립투사의 혼이 묻힌 묘지일 가능성이 높다. 탐방단의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원혜일 양은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40년 가까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독립투사들의 유해가 묻혀있던 흔적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고 말했다.

그나마 송경령능원의 묘는 표지석이라도 남아 있어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임시정부청사와 홍구공원의 탐방을 마친 탐방단이 찾은 인민로 40호의 근검여사(勤儉旅社)로 이동했다. 근검여사는 여관으로 1932년 10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단,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군동지회 등 5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통일전선단체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을 협의한 장소다. 분열된 항일 투쟁 조직이 연합을 위해 논의하고 모색했던 역사적 의미가 깃든 장소다.

현장은 비참했다. 여관 주변 곳곳에는 건물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여관 건물 역시 이미 건물의 일부가 철거중이었다. 간판만이 이곳이 일제시대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투사들이 모였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상하이 발전의 상징인 푸동지역을 뒤로 하고 있는 여관의 주변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탐방 이틀째인 8일 탐방단은 쑤저우(蘇州)를 거쳐 난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징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한.중공동연대가 진행되면서 민족혁명당, 조선혁명간부학교, 김구계열의 학생훈련소, 주화대표단 본부 등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수립돼 활동한 지역이다. 또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가 설립돼 1기에서 3기까지 125명의 청년투사를 양성한 곳이다.

탐방단은 3기생이 훈련했던 천녕사를 방문했다. 천녕사가 있는 장산림구(長山林區)는 난징시(南京市) 강령구(江寧區) 상방진(上坊鎭)에 위치한 곳으로 난징 시내에서 차량으로 1시간30분을 이동해야 하는 난징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천녕사는 장산림구에서 내려 산길을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거의 폐허가 된 상태로 정문 주춧돌, 우물과 화장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춧돌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현판에 ‘천녕사’라는 글씨만이 남아 있어 옛 장소를 가르쳐 줄 뿐이다. 한국외대 중국어과 김기영 군은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적막한 산하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훈련했던 투사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흔적이 너무 외롭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탐방은 찜통더위 속에 진행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천녕사를 탐방한 탐방단은 운암 김성숙 스님이 1937년 난징으로 김원봉 스님을 찾아와 항일단체들의 연합을 모색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김원봉 스님의 일행은 호가화원(胡家花園) 인근의 묘오율원(妙吾律院)과 이연선림(怡然禪林)에서 거주했다. 탐방단이 방문한 호가화원 일대는 옛 모습은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빈민촌으로 변해 있었다. 김원봉 스님이 머물렀던 묘오율원과 이연선림의 위치는 탐방단의 방문 전까지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곳이었다. 탐방단은 마을의 노인들에 물어 어렵게 묘오율원의 위치를 확인했다. 묘오율원은 현재는 고와관사(古瓦官寺)라는 절로 변해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이곳에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항일투사들이 머문 곳임을 알려주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복원중인 고와관사의 철법(撤法)스님은 “고와관사가 19세기 후반부터 묘오암으로 불렸으며, 현재는 옛 이름으로 복원중”이라며 김원봉 스님과의 관련성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철법스님 조차도 고와관사가 한반도의 민족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리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와관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구법을 했던 동진의 고찰이기도 하다.

난징 방문 후 탐방단이 찾은 곳은 우한(武漢)이다. 난징에서 우한까지는 야간열차로 이동했다. 13시간의 시간이 걸렸다. 고된 일정에도 불구하고 탐방단원들은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우한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 12월 난징이 일제에 의해 점령되자 수많은 항일 투사들이 머물던 곳이다. 우한에서 항일단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중국 본토지역에서 무장항일투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탐방단은‘조선민족전선연맹’이 거주했던 곳과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나마 조선의용대가 창설됐던 한구(漢口) YMCA 건물은 말끔하게 새롭게 단장해 있었으며, 건물 외벽에는 건물의 역사를 기록한 비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주로 활동했던 건물은 3층 건물의 남루한 모습만을 간직한 채 상가로 변해있었다.

탐방단은 11일 광저우에 있는 항일유적지를 방문한 후 1945년 해방 직전 까지 임시정부가 있었던 충징을 탐방하고, 13일부터 15일까지는 베이징에서 태허스님의 후손과의 만나며, 베이징대 학생들과도 토론회를 가질 예정이다.

광저우=박기련 기자 krpark@ibulgyo.com

[불교신문 2253호/ 8월16일자]


# 태허스님의 생애

  일제 강점기 중국서 항일운동
  해방 후엔 남한서 통일운동 헌신

임시정부 요인들과 찍은 단체사진. 원 안이 태허스님. 자료제공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의 평생 동지이자, 정신적, 사상적 스승으로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로 묘사된 김충창이 운암(雲岩) 김성숙(金星淑)으로 알려진 태허스님이다.

식민지 시대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후에는 남한에서 극좌 극우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일에 온 힘을 다 바친 스님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1916년 독립군에 가입하기 위해 만주 신흥학교로 가려다 일본군에 체포된 후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로 출가한 그는 월초스님에게 받은 법명은 성숙(星淑)이며, 법호는 태허(太虛)다. 18년부터 봉선사에서 월초스님을 모시며 수학했다. 당시 월초스님과 친분이 깊던 손병희, 김법린, 만해 한용운 스님과도 교분을 쌓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으며, 양주와 포천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이후에도 스님 신분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조선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해 항일활동을 펼쳤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스님 5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부했다. 베이징 유학시절에는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이 되며, 장건상, 김봉환, 장지락(김산) 등과 더불어 창일당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혁명’을 발행하며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스님은 항일운동단체의 분열을 반대하는 내용의 글로 항일조직의 통일과 연대를 강조했다. 또한 이때 조선의열단에 가입해,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조선의열단에서 항일운동을 지도하던 스님은 1926년 광저우(廣州)로 가 광동지역 300여명의 청년을 규합해, ‘유한한국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이와함께 기관지 ‘혁명운동’을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1927년에는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요한 사건인 광동코뮌에도 참여했다. 이때 스님은 당시 한국 독립운동의 주무대였던 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에서 활동했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스님은 상하이에서 〈일본경제사론〉, 〈통제 경제학〉,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한국 혁명의 중요한 이론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스님이 주도해서 결성했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동맹’을 연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설해, 상임이사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결성,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기관지 ‘의용대통신’을 편집 간행했다.

충칭(中慶) 임시정부 시절, 스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해체하고 임시정부와 통합에 앞장섰다. 이후 임시정부의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으로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고 임정을 떠났다. 스님은 이때 친미적인 이승만 세력이나, 친일파들의 극우노선, 박헌영의 극좌 노선도 따르지 않았다.

이후 스님은 ‘혁신계인사’ 또는 ‘중간파’로 분류돼, 옥고를 치루기도 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굴절과 패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설자리를 잃고 정치적 낭인으로 떠돌다 1969년 4월12일 숨을 거뒀다. 4월 18일 영결식이 조계사에서 거행됐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스님에게 조국이 준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으며,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을 살다 갔다.

박기련 기자 krpark@ibulgyo.com

[불교신문 2253호/ 8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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