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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줌] 의열단 활동무대서 ‘조국애’ 품다
관리자
조회수 : 3280   |   2006-08-10


의열단 활동무대서 ‘조국애’ 품다 김성숙 선생, 행동강령. 정치노선 주도 이론가 역량 발휘 운암 김성숙 항일운동 사적지 중국 탐방-<2> ▲탐방단, 난징에서 의열단의 열정에 감동 ‘제1기 운암 김성숙 항일운동 사적지 중국탐방단’(이하 탐방단)은 탐방 사흘째인 9일 장쑤성(江蘇省)의 성도(省都)로 7대 고도(古都)의 하나인 난징(南京)에서 무력 항일투쟁단체였던 의열단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그들의 조국애를 되새겼다. 난징에는 유명한 한글학자였던 김두봉 선생과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김규식 박사가 교수로 재직한 의열단의 간부양성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생들의 훈련 장소였던 천녕사, 의열단 단장 김원봉 계열의 학생들이 생활한 호가화원 등 의열단의 주요 거점들이 남아 있다. 당시 무력투쟁단체로 이름을 날렸던 의열단의 단장은 김원봉이었지만 의열단의 행동강령을 만들고 정치노선을 이끌었던 사람은 김성숙이었다. 김성숙이 의열단에 가세하면서부터 의열단의 투쟁방침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언제나 단원의 죽음과 맞바꿔야 하는 테러활동을 벌여왔던 의열단이 고난도 정치공작에도 눈을 뜨게 된다. 무조건적 개인희생의 방식을 벗어나 간부들을 키워 보다 나은 무력투쟁 방식을 연구하면서 후일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난징에서 또 한 명의 유명한 사람이 ‘광야’의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다. 이육사는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동안의 교육을 이수한 뒤 1933년 4월 20일 졸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육사와 김성숙이 함께 활동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6살 차인 두 사람의 활동반경이 너무나 비슷해 어떤 식으로든 함께 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이육사는 의열단의 실제적인 ‘두뇌’로 활동했던 김성숙의 정치노선을 따랐을 것이고, 이들은 1927년 ‘광동코뮨’에 김산 등 다른 한국인 혁명가들과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탐방단은 의열단 간부양성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훈련 장소였던 천녕사, 민족혁명단 거점지(현 호가화원) 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 등도 탐방했다. 탐방단 강민경(평택대 3학년)씨는 “무력투쟁단체였던 의열단 간부들이 직접 훈련받았던 곳에 와 보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깨달았다”며 “내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고맙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편 탐방단은 이날 밤 중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편인 열차를 이용, 난징을 떠나 김성숙 선생이 직접 조직했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자리 잡았던 무한(武漢)을 향해 무려 13시간을 이동한다. <사진설명> ‘제1기 운암김성숙 항일운동 사적지 중국탐방단’이 상하이 동방여사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동방여사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회의 장소였으나, 최근 개발정책으로 철거 중이다. 정민규 기자 2006.8.10 데일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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