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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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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독립운동에 헌신한 현대 한국의 보현보살"
관리자
조회수 : 3344   |   2006-05-02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재조명 여론 확산 스님 출신으로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1898~1969)을 재조명하자는 종단 안팎의 여론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1월 23일 창립한 사단법인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는 태허스님 기념 테마파크 조성, 독립 유공자 후손 및 불자 자녀 장학사업 등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 스님의 수행사찰인 남양주 봉선사, 국가보훈처 등이 주축이 돼 곧 후원회가 결성될 예정이어서 그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스님의 독립운동 업적이 빛을 볼 전망이다. 일제강점기, 부처님의 깨달음과 자비사상으로 억압받던 민족을 구하고자 힘쓴 운암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웠다. 한일합방이후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운암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이때 배운 한문이 출가 후 불교경전을 빠르게 익히는 밑거름이 됐다. 운암이 민족의 위기에 대해 자각한 것은 당신의 집을 찾아온 삼촌의 영향도 컸다. 대한제국 당시 정위(正慰)를 지냈던 삼촌은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다. 운암은 삼촌으로부터 독립군에 가담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특히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향하던 청년 운암은 경기도 용문사 스님이었던 풍곡신원(楓谷信元)선사를 우연히 만나 불교를 접하게 된다. 불교는 이후 운암의 항일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었다. 1916년 용문사에서 출가,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은 운암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했다. 1918년엔 남양주 봉선사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이때 조실이었던 월초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 바로 성숙(星淑)이다. 스님은 초대 동국역경원장 운허스님과 도반이었으며 현 봉선사 조실인 월운스님에게는사숙이 된다. 당시 봉선사에 출입이 잦았던 한용운·김법린스님,손병희 등과 친분이 두터웠던 스님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부평리 일대에서 항일시위를 주도했다. 봉선사 스님이었던 이순재 김석로 강완수 등과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인근 동리에 살포했던 것이다. 이 일이 발각돼 일본 경찰에 체포된 스님은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한 운암은 잠시 봉선사에 머물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22년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던 운암은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듬해인 1923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 기틀을 다지는 한편, 장건상 장지락 등과함께 창일당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했다. 사회중의 계열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는 바로 운암을 지칭한다. 그후 조선의열단에 가입해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던 운암은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보다 적극적으로 일제와 싸웠다. 1937년 중일전쟁을 발발하자 "조선민족 전선연맹"을 결성한 운암은 1942년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했으며 이듬해 국무위원으로 임명됐다. 김구 김규식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운암은 극심한 좌우갈등의 벽에 부딪혔다. 이념대결보다 민족 해방에 우선을뒀던 운암은 해방 후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에게 떨어진 보답은 미군정에 반대하는 좌익인물이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이었다. 그에 대한 국가권력의 박해는 계속됐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운암은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10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잡지<신동아>에 실린 ‘김성숙 회고록-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말’에는 광복 이후 고단했던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1969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표제는 ‘애국지사 고(故) 김성숙 옹, 중태 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 유산은 단칸집 한 채, 퇴원비 만원 없어 허덕여’였다. 그럼에도 운암은 끊임없는 정권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야당의 거두로 민주세력을 결집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운암의 정치적 후배이기도 하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운암은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1969년 숨을 거뒀다. 민족독립의 별이 초라하게 지는 순간이었다. 좌우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의 꿈도 운암의 좌절과 함께 파산했다. 그러나 운암이 간 지 약 30년 만에 그를 추모하는 열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생전 그의 지인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려는 사람들로 구성된 운암 김성숙 기념 사업회는 잊혀진 역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운암 김성숙 선생과 같이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좌익 용공으로 몰려 아직까지 업적을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며 “광복 61주년, 민족정기 확립을 완수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장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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