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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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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항일민족운동의
관리자
조회수 : 3709   |   2006-02-02


楣碩欲珦?즐거운 한때 (윤소암 - 시사평론가, 시인)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흔들고 분열시켜 국민들의 지지도가 바닥일 정도로 잘못하는 일이 많은 와중에도 잘하 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과거 역사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과 좌익 계열 의 애국지사를 인정하는 작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함되겠지만 대표적인 분이 여운형·조봉암 선생으 로 중도적인 진보적 정치인이나 좌익으로 몰려 우익 정권에 의해 암살 ·사형 당한 분이다. 그런데 위의 두 분을 능가하는 혁신적 항일운동가로서 혁혁한 공을 세 우고, 해방공간에 민주주의와 통일 국가를 새우기 위해 좌익과 우익 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시절에 올곧은 중도 민족주의와 중도민주주의 를 고수함으로서 국민과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분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운암 김성숙(일명 김창숙) 선생이시다. 일제통치시기와 해방직후의 미군정, 이승만·박정희 극우 반공 정권 에 의해 한결같이 탄압과 투옥을 겪은 선생은 갖은 회유와 압력에 흔 들리거나 굴복하지 않고, 일신의 평안과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신하 고 변절한 수많은 지식인·정치과들과 다르게 오직 나라의 독립과 평 화통일, 진주주의 정치를 위해 몸을 바쳤다. 그동안 정치·사상·시대적인 이유로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거나 가려 진 사실이 많다고 볼 때 만시지탄이나,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된다 는 시대적 당위성이 있다. 선생은 특이한 삶을 사신 분이다. 1898년 평안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가 되어 양주 봉 선사와 용문사에서 5년간 불교학 연구와 수행에 힘썼다. 당시 독립선언문 33인의 대표였던 손병희의 친구였던 홍을초 노승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용운과 역시 불교독립운동가였던 김법린과 친해 3 ·1 독립운동의 주모자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26세 때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에 망명한 선생은 북경 민국대학 과 광동의 중산대학에서 각각 정치·경제학을 연마했고, 조선민족해방 동맹과 조선민족전선동맹을 결성했으며, 광서성 성립사범대에서 정치 학 교수를 역임하는 등 승려 출신으로 드물게 탁월한 정치사상가였 고, 진보적인 경제이론가이며, 실천적인 혁명가였다. * 좌우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중도정치 혁명가의 길* 북경에서 선생은 같이 간 승려 다섯 분과 문학단체를 만들고 잡지 "황 야"를 펴내었다. 시·소설과 철학적인 내용이었다. 이 기간동안 김봉 환·김규하 선생 등은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나머지 세 명은 혁명사상 을 받아들이지 못해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닐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소개) 2년 후 창일당에 가입했다. 동지로는 장건상·양명·장지락(닐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으로 표기)·이낙구·김봉환 등이었고, 진보 적인 혁명단체로서 기관지 "혁명"을 발행하였다. 선생은 "혁명"의 주필을 맡아 주옥같은 논설문을 많이 섰다. 이 잡지 는 수천명의 고정독자를 확보했고, 국내는 물론 만주·시베리아 호놀 루루·캘리포니아·유럽에 있는 조선유학생들에 발송되었을 만큼 호응 이 높았다. 당시 북경에서는 한글판을 인쇄할 시설이 없어 선생은 모든 글을 손으 로 서서 석판 인쇄하였다. 힘든 작업 때문에 선생은 한동안 실명위기 에 있을 만큼 잡지의 발간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는 한편 고려유학생 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하고 단재 신채호 선생과 유우근 동지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 참여해 선전부장을 맡았다. 선생은 1925년 북경정부의 추방을 받고 광동의 중산대학으로 옮긴다. 중국혁명의 거점인 광동으로 모여든 조선 청년 300여명을 규합해 유학 한국혁명청년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을 편집간행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성토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제창하였다. 선생은 국민당·공산당의 분규로 발생한 광동인민폭동에 참여해 시가 전을 주도하다가 당국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한 때 애인의 집에 피신하 기도 한다. 훗날 선생은 진보적인 여류작가인 "두군혜"라는 여성과 결 혼하게 되는데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 셋은 현재 북경에서 학자와 고 위공직자로 이름이 높다.   선생은 광동 폭동에서 흩어진 청년 등을 중심으로 중구각지에서 활약 하는 조선혁명청년들을 총 규합해 재중국조선총동맹을 조직하고 조선 지역과 만주지역으로 투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1929년 상해에서 중 국문화총연맹과 작가연맹에 가입, 신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닐 웨일즈의 "아리랑에"는 선생의 활약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김충창(김성숙)은 언론출판일에 종사하면서 파시즘에 관한 여러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그는 식민지의 학생 문제 와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 논문을 묶은 훌륭한 책을 펴내었다. 여러 가지 필명을 사용해 모두 스무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조선 혁명의 중요한 이론적 지도자이다" 선생은 또한 많은 세계적인 진보지식인들을 만났다. 미국의 얼 브라우더, 소련의 브로딘, 인도차이나, 인도, 대만에서 온 혁명가들과 민족독립 방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1931년에는 중국 반 제국주의동맹의 간부로 기관지 "봉화"와 "반일민족"의 편집책임을 맡 았고, 채정안 장군이 지휘한 19로군의 송암 항일전쟁에 참여하였다. 1938년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만들고 "의병대 통신"을 편집·간행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에서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지게 된다. 중경에서 한구독립당·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을 통합해서 한국독립당이 발족하게 되고 선생이 이끌던 한 국광복전선과 조선전선연맹도 발전적으로 해체해 한국독립당으로 뭉치 게 되었다. 집행위원장에 김구 선생이었다. 선생의 단결운동에 힘입어 독립단체들이 하나로 통합하면서 다양한 애 국지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는데 김구 선생이 주석, 부주석에는 김규 식, 김원봉은 군무부장(국방장관), 선생과 장건상 유림 대표는 무임 소 국무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43년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유엔총회의 대표 단을 보내기로 하고 조소임을 단장, 미국에 있는 이승만을 부단장으 로 파견했으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훈련과 달리 반소련 전단을 총회 장에 뿌리고 반소활동을 맹렬히 벌였다. 이미 그는 친미주의자가 되 어 있었던 것이다. *가난과 병고로 비참한 만년의 삶* 선생이 항일운동의 망명생활 30년을 접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으나 기다린 것은 미군정의 통치, 미국과 소련의 지지와 반대, 좌우이념의 극심한 갈등이었다. 1945년 12월 3일 경교장에서 김구의 극재로 임정 국무회의 임정 국무회의가 열렸고, 이승만이 발언했다. 모스크바 3상 회담에서 거론된 신탁 통치안은 이 땅에 찬·반탁과 좌우이념의 3·8 선을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사상적 이념과 정치철학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친미찬탁을 정권획득의 수단으로 한 이승만이나 순수한 입 장에서 친미찬탁을 주장한 김구 선생마저 선생은 비판하였다. 민족을 둘로 갈라놓고 독립과 광복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 은 미군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6개월 구금되기도 한다. 북경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한 선생이었지만, 결코 공산주의 이념이 목적이 아니었다. 민족의 독립이 먼저 온 세계인민의 해방은 두 번째 라는 것이다. 아리랑에서 불굴의 항일애국지사 김산이 스승으로 모셨 던 붉은 승려 김충장으로 불려졌던 선생이지만, 좌파진보지식인임이 분명하나, 결코 좌파가 아닌 순수민족주의자요, 온건하고 합리적인 좌 파였다. 혁신진보세력의 중심에 서서 선생은 혁신당에 줄곧 몸담아 있음으로 써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서 몇 차례나 좌익으로 몰려 옥살이를 했다. 4·19 직후 사회대중당을 혁신세력과 함께 창당했으나,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혁신계 인사들에 대한 검거열풍으로 10개월을 복역하 고, 그것도 독립유공자가 인정되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환갑이 넘 은 나이다. 1961년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의장이 되었고, 혁신계의 원로로 있었으나, 가난과 병고로 집 한칸 없이 셋집으로 전전하는 말 년을 보내었다. 1969년 4월에 만 71세로 입적, 서거한 선생은 병원치 료비가 없어서 퇴원도 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 조국의 독립과 항일투 쟁 그리고 이 땅의 민족주의와 평화통일을 부르짖은 선생은 사회장으 로 치러졌고, 십몇년이 지난 1982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 었다. 좌우이념대결과 남북정권의 시대주의를 물리치고 민족의 주체성과 좌 우합작, 평화통일의 길을 제시한 선생의 중도통합론과 민주적 사회주 의를 위해 평생 몸바친 선생의 숭고한 삶은 이 시대 최대의 화두일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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