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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종교신문] 스님 출신으로 유일하게 임정 국무위원에 오른 운암 김성숙
관리자
조회수 : 125   |   2021-08-20


조계종 봉선사에 태허 스님으로 출가…독립운동과 민주화에 헌신한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가 

 

태허(泰虛스님운암(雲巖김성숙(金星淑. 1898-1969)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며 일생을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헌신한 불교계 대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의열단광저우 혁명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좌우가 통합된 충칭(重京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선전위원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민주투사이자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일독립지사이다뿐만 아니라 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본사 봉선사 출신 스님이다. 

 

태허 스님은 민중을 위한 원력행 계승”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의 서거 52주기 추모재가 523일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현충관에서 거행됐다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가 마련한 이날 추모재는 선생에 대한 경례약사 보고추도사추모헌정의 순으로 진행됐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총무부장 금곡 스님이 대신 읽은 추도사를 통해 스님은 3.1운동 당시 스님들을 규합해 양주양평포천 등지에서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대중에게 배포하는 등 선봉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셨다며 오늘날 한국불교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이 자주독립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태허스님의 원력행이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며 태허 스님의 업적을 추앙했다.

 

태허 스님의 출가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도 스님께서는 의열단에서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약하시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해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셨다면서 스님으로서독립운동가로서광복 이후에는 반독재운동을 벌인 태허 스님의 생애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추모재에 참석한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도 단상에 올라 헌화 분향하고 일신의 안락을 버리고 만주벌판에서이 땅에서 아귀야차 같은 일제에 맞서 조국과 민중을 위해 한평생을 사셨고 해방 후에는 민중을 위해 혁신과 진보의 삶을 사셨다면서 민중이 고통스러워할 때 외면하지 않고 한 몸 바쳐 사신 분이라며 태허 스님의 생애를 추모했다.

 

김원웅 광복회장도 생전 운암 선생의 일념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이었다며 자신의 안위를 접고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운암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국민 모두가 간직하고 계승해야 할 최고의 가치와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

 

1898년 310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한 태허 스님은 대한독립학교에서 수학하다 경술국치 이후 폐쇄되자 할아버지로부터 한문과 불교경전을 배웠다. 1916년 신흥무관학교 입학을 꿈꿨으나 여의치 않자 1918년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오신 풍곡 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했다본사인 봉선사에서 월초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고 불학(佛學)을 공부했으며 월초스님과 인연이 있었던 의암 손병희 선생과 김법린 스님만해 한용운 스님 등과 교류했다.

 

1919년 봉선사에서 정진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순재김석로강완수 스님 등과 함께 독립문서를 만들어 대중에게 살포하다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에는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23년에는 불교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고혁명단체인 창일당을 조직하고 조선의열단에 가맹하는 등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1937년 중일(中日)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 등을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해 활동했다이후 광복군에 편입되어 기관지 의용대통신을 펴내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데 이어 이듬해에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 군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전쟁 후에는 조봉암 등과 진보당 건설에 주력했다. 1957년에는 진보당민주혁신당 등 진보세력 통합을 위해 애썼으나 이승만 정권이 선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아 다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5.16 군사혁명으로 국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을 이유로 운암을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10개월간 또다시 옥에 가뒀다.

 

태허 스님은 1960년대 혁신정당 운동을 통해 진보와 혁신의 세상을 끊임없이 추구했으나 1969년 412일 가난과 궁핍 속에서 입적했다이후 1982년 정부가 고인의 공훈을 기리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면서 스님의 항일 업적이 재평가를 받았다그후 2004년 728일 국립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묘역에 유해가 안장됐다.

 

독립운동가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현충재 봉행

 

현충일을 맞아 대한불교조계종 25교구본사 봉선사 출신 스님으로 평생 독립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 현충재가 열렸다.

 

사단법인 범패와작법무보존회(회장 능화스님이하 보존회) 봉선사 태허스님을 선양하는 단체인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이하 사업회) 함께 '19 독립운동가를 위한 현충재행사를 인천광역시와 광복회의 후원으로 현충일인 66 오후 3 인천 미추홀구 매소홀로(인천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풍류관에서 봉행됐다.

 

태허스님은 봉선사  스님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 통합에 앞장서며 충칭(重京)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고, 1945 해방을 맞아 환국(還國) 준비하면서 임시정부에서 ‘약법 3 통과시켰으며 3 내용 중에 대립이 아닌 통합을 위해 좌우 모두 포섭하면서도 · 강대국과는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대국들과 치열한 협상을 통해 자율성 공간을 우리 스스로가 확보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해방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며 혁신정당인신민당 창당의 주역으로 민주화운동에 매진했으며정권의 탄압을 받다 1969 4 12 도반들이 비나 피하라고 마련해준 '피우정(避雨亭)'에서 원적에 들었다.

 

이번 행사는 인천의 역동적이며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선인들을 기리는 취지에서 진행되며 이를 통해 통일을 염원하고 남녀노소가 우국충절을 바칠  있는 참사람이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열렸다

 

출연진으로는 예능보유자 능화스님조교 남미애(인화), 이수자  임명희  12전수생 양정숙  11명이 참여했다특별초대로 김묘선 국가무형문화재 28 승무 전승교육사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김수현의 살풀이하나은의 법고춤으로 함께 했다. 

 

 

 

 행사는 개회(사회자 김진희), 법사물연주(범종:아승 스님목어:이병근운판:김민석법고:박상훈), 옹호게(능화스님임희숙모규순임명숙), 명발 바라춤(임명숙김남용진경희이경자김은옥모규순양정숙),  ()운암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유족대표 인사(손녀 김경선), 상축(보신스님), 법고춤(인화스님호적:성법스님), 도량게+좌립(능화스님임명숙김남용김민주진경희이경자김은옥모규순양정숙), 회심곡(능화스님), 금강경찬(다함께), 천수바라(능화스님인화스님성법스님아승스님법해스님지연스님박상훈전법사장영희전법사양현성전법사김민석전법사김남용임명희임명숙모규순이경자양정숙진경희순으로 진행됐다.

 

보존회는 지난 2003년부터 현충재를 매년 진행해왔고이번 행사는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됐고 이전과 달리 관객들의 직접적 참석  관람은 못했다대신 유튜브 생중계을 통해서 동참  시청했다 

 

3.1운동 주도한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임시정부 국무위원까지 올라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조계사서 치러진 장례까지71년 일대기 다룬 '평전출간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는 불교계에서 태허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고스님 출신으로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운암 김성숙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 운암 김성숙(김삼웅 지음 /선인)을 2020년 5월 출간했다. 

 


나는 이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할 일을 다 한 것이다.”(1964년 213일 운암 김성숙 선생 일기’ 중에서)

 

1919년 3.1운동 당시 봉선사 스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국가보훈처 산하 선양단체인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가 펴낸 운암 김성숙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집필했다.

 

운암 김성숙은 운암의 출생양평 용문사 출가항일운동의열단 활동두쥔훼이(杜君慧, 1904~1981)와의 사랑과 결혼임시정부 시절과 이승만 폭정에 대한 항거,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시절 및 병고(病苦)와 서거까지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운암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의 평전으로 시간 순으로 이루어진 실화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돼 눈길을 끈다여기에 최초 발견 자료인 운암의 필체로 쓰인 조선민족해방동맹 기관지 신조선’ 5호와 수형(受刑)기록표도 함께 소개했다.

 

1989년 평안북도 철산군 태생인 운암은 10대 때 용문사에서 출가했다이후 1918년부터 남양주 봉선사로 옮겨가 월초스님 문하에서 수학했다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의암 손병희만해 한용운 등과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운암은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양주포천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그는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무산자동맹회 등에 참여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초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베이징 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사회주의를 공부한다한편으로는 불교유학생회를 조직하고불교유학생회 소속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들과 고려유학생회를 결성해 비밀결사 활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운암은 칩거에 들어간다중국혁명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것이란 희망으로 중국의 사회주의에 앞장섰지만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중국인 두준훼이와 결혼한 이후 문학 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을 전개했다운암이 항일민족운동 진영으로 돌아온 것은 1935년이다상하이(上海)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고 중국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뛰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한 그는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됐다광복 후에는 임시정부를 대표해 비상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하지만 이내 신탁통치의 회오리에 휘말렸다신탁을 두고 친소반미친미반소의 좌우대립이 극심해지면서좌우대립을 지양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묻히고 말았다.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불렸던 운암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구속돼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석방된 그는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통합 야당인 신민당 운영위원과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 1969년 412일 서울 구의동 소재 피우정(避雨亭)’이라 이름 붙여진 11평짜리 집에서 별세했다.

 

장례는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유해는 파주군 묘소에 묻혔다혁신 인사로 낙인찍혀 옥고를 겪으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그의 공훈은 인정받지 못했다결국 운암이 세상을 떠난지 13년 만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비로소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장은 이 평전의 발간으로 스님 출신으로 유일하게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신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의 민주화 운동항일운동과 중국 관련 독립운동사 연구에 초석이 될 것이라며 평전은 기념사업회를 통해 전국의 국공립 도서관각 대학 및 사학과독립운동 연구자들에게 증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운암 김성숙 선정

 

유대수 작가의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 제3차로 운암 김성숙선생이 선정됐다의열단조선의용대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국무위원 등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다. 

 

 

 

운암임시정부기념관건립 추진

전시시설도서관어린이놀이방 등 포함한 문화센터로 

 

봉선사 태허스님기념관-운암임시정부기념관(가칭)’이 건립된다운암김성숙기념관은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운암 김성숙선생과 항일투쟁가들(의열단·조선의용대·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등)이 남긴 자취 및 자료와 민주화운동을 수집·전시함으로써 후손들에게 민족의 얼과 긍지를 심어주며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고양시키는 역사의 장 역할을 하게 된다.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태허스님사업회)는 항일 투쟁의 최일선에서 일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봉선사 태허 스님으로 잘 알려진 운암 김성숙 선생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높은 뜻을 기리며 선양사업에 힘쓰는 국가보훈처 산하 보훈단체이다.

 

운암임시정부기념관은 국비지방비사업회자부담 등 총 360억 원을 들여 대지면적 21,388에 지하 1지상 3층의 규모로 전시시설과 함께 도서관어린이놀이방 등을 포함한 문화센터로서 건립을 추진 중이다.

 

사업회는 건립취지문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과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국민들이 역사를 배우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더불어 시민들을 위한 쉼터와 문화교육공간을 함께 제공하겠다고 건립취지를 밝혔다. 

 

운암의 부인 두쥔훼이에 건국훈장 추서

국가보훈처, 2016년 제71주년 광복절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한 봉선사 승려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선생)의 중국인 부인으로 중국의 저명한 여성혁명가 두쥔훼이(杜君慧선생에게 정부가 2016년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두쥔훼이의 건국훈장 추서는 남편인 운암 김성숙 선생과 함께 부부가 건국훈장을 추서 받는 첫 번째 사례이자외국인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는 매우 희귀한 사례로 기록됐다운암은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두쥔훼이는 운암의 부인으로, ‘조선의 딸을 자처하며 한국독립을 도운 중국인 여성이다두쥔훼이 선생은 중국 광저우(廣州중산대학 재학 중 항일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광저우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던 한국인 김성숙을 만나 1929년 상하이에서 결혼했다이때부터 한·중연대의 신념으로 남편과 함께 항일 선전활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또한 한국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1943년 2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요원, 1945년 5월 한국구제총회 이사로 활약했다두쥔훼이가 한국의 독립을 얼마나 간절하게 염원했는지는 미국에서 발행되던 獨立(독립)(1945.7.11)에 기고한 논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이 논설에서 두 선생은 자신을 조선의 딸로 자처하고 나는 늘 조선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어떻게 하여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다면서 독립운동가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할 만해

 

국가보훈처는 두쥔훼이 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항일여성운동 분야에서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의 이유를 밝혔다민성진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운암 김성숙 선생의 부인이며 중국에서 저명한 혁명가인 두쥔훼이 선생이 남편에 이어 건국훈장을 받게 된 것은 국가는 물론 불교계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며 두쥔훼이 선생에 대한 건국훈장 애족장 포상은 큰아들 두감(杜甘)이 거주하고 있는 중국 광저우 영사관에서 이뤄진다고 밝혔다. 

 

 

 

두쥔훼이(杜君慧선생은?

 

1904년 중국 광둥(廣東)성 출신이며, 1981년 중국 충칭(重京)에서 생을 마감했다두쥔훼이 선생은 중국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여성엘리트 운동의 혁명가로 '중국부녀자운동 이론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고한국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 부인으로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韓中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아 지난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두쥔훼이 선생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중매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운암을 만나 1929년 상하이에서 결혼했다이때부터 한·중연대의 신념으로 남편과 함께 항일 선전활동에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1935년 상하이여자부녀계구국회(손문의 부인 손경령 여사가 조직)의 서기 및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이후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한중문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부원 및 과원으로 활동했으며, 1945년 5월에는 한국구제총회(韓國救濟總會이사로 활동했다. 1945년 이후 두 선생은 중국공산당의 고위직 제의를 사양하고반평생을 건국인재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부녀자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항일구국운동의 교육활동을 펼쳤고여성계몽활동과 교육문화계에 전력을 기울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에는 미국에서 발행되던 독립(獨立)’에 항일독립운동에 한·중연합의 필요성과 한국독립운동가에 대한 후원을 호소하는 해외 조선부녀 동포들에게혁명자 후원사업을 하자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논설에서 두쥔훼이 선생은 조선민족해방의 전도는 더욱 중대하여지고 긴박해짐에 따라 조선부녀들이 더욱 준비하고 실행하여 독립운동가를 후원해야한다고 호소했다.

 

이처럼 두쥔훼이 선생은 중국인 여성이지만 조선부녀를 동포로 호칭하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이후 그는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활동하며 직접 한인독립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두쥔훼이 선생에 대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는 조선민족전선연맹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한 김성숙의 부인으로 또 하나의 조국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중국의 저명한 여성혁명가의 공적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수암(守岩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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