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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친일파’ 국립묘지 안장은 헌법 부정
관리자
조회수 : 96   |   2020-07-22


‘한국군의 아버지’ 또는 ‘친일 군인의 전형’으로 평가받던 백선엽 장군이 7월10일

자연으로 돌아갔다.

 

생전에 많은 칭송과 대접을 받았으며, 사후에도 ‘한국군의 아버지’이며 ‘6·25전쟁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이에 걸맞게 그의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져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빈소에는 저명인사들뿐 아니라 6·25전쟁 전우부터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조문객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그의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하는 단체들 성명이 연달아 발표되고, 그가 묻힌

국립대전현충원 앞에서는 소동이 일었다.

 

그의 일생에는 ‘식민통치-민족분단-전쟁-갈등’의 한국 근현대사가 압축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한국 사회에 이토록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고 떠난

것일까?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권력 ♡아 군인의 길로

 

1920년 11월23일 평남에서 태어난 백선엽은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교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만주군의 중앙육군훈련처를 선택했다.

 

일제는 1931년 9월18일 류탸오후 사건(일본군이 류타오후의 만주철도를 스스로 폭파)

기화로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음해 3월1일 만주국을 설치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기 훨씬 전부터 식민지 조선인들도 희망을 꿈꾸며 만주로 향했다.


일확천금을 벌어 부자가 되려던 사람도 있었고, 살기 힘들어진 식민지 조선을 떠나려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민중도 있었다.


그중에는 조국을 되찾으려는 망명객도 있었다. 스무 살의 백선엽은 권력과 힘을 ♡아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이른바 ‘봉천군관학교’로 알려진 만주의 중앙육군훈련처는 처음부터 조선인은 받아들이

않다가 3기(김정호. 이승만 정권기 국방부 제3국장,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냄. 1961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으나 석방)부터 받아들였고, 식민지 조선의 많은 청년이 이곳을

거쳐갔다.


1941년 12월 봉천군관학교(9기)를 졸업한 백선엽은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

거쳐 1942년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자무쓰의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일제는 만주국이 독립국·근대국가라며 ‘왕도낙도’(王道樂土·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향),

‘오족협화’(五族協和·일본, 조선, 만주, 중국, 몽골인이 협력) 등을 선전했다.

 

그러나 만주국은 인사와 재정, 자원 등 제반 행정을 관장한 총무원은 일본인 관리가 통제

하며, 관동군이 이면에서 통제하는 ‘내면지도’(內面指導)가 시행되던 일제의 또 다른 식민

지였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조선과 중국의 민중이 힘을 합쳐 대항하고 일제는 만주군을 동원

강력하게 이를 짓눌렀다.

 

관동군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정규군이었고, 만주군은 그 아래에서 항일독립

압살하며 만주의 치안(?)을 유지하는 기구였다.

 

만주군에서도 일본군이 지휘하는 내면지도가 시행됐고, 이 때문에 만주군 출신들은 고문관

제도에 익숙했다.

 

광복 뒤 만주군 출신들이 주한 미군 고문관들과 크게 대립하지 않은 이유이다.

 

일제는 1938년 12월 만주 명월구(明月溝)에서 간도특설부대를 만들었다.

 

간도특설대는 대표적 친일파인 간도성장 이범익의 제안으로 만들어졌으나 일본 군인들이

지휘하는 부대였다.

이 부대는 ‘만주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항일부대, 그중 조선인 항일부대를 토벌하는 특수부대’

였다. 부대의 지휘관들은 일본군 장교였으나 나머지 부대원들은 조선인이었다.

 

일본군 장교조차 “부대는 군규가 엄정하고 고통과 부족함을 잘 견디며 특히 야간행동에

능숙했다.

 

용어는 모두 일본어를 사용하고 안투현(현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의 토벌작전에 자주

출격하여 전과를 거둬 상승(常勝) 특설부대로 유명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간도특설대는

토벌전에서 ‘늘 이기는 특수부대’였다.

 

 

 

백 “독립 위해 싸우던 한국인 토벌”

 

 

간도특설대는 설립부터 해산 때까지 총 108차례 ‘토벌’에 참여했다. 이 와중에 ‘사살’된

‘항일전사, 혁명가속, 혁명군중’이 172명, 체포된 자가 139명이었다. 이외에 ‘토벌’ 행동

중에 벌인‘강간·강탈·고문·구타·방화 등의 죄악’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 공로로 만주국 정부로부터 1945년 3월21일 조선인 167명, 일본인 8명이 각종 훈장을

받았다.


(‘만주국정부공보’, 1945년 3월21일치; 조건, <일제의 간도성 ‘조선인특설부대’ 창설과

재만 조선인 동원(1938~1943)>에서 재인용) 일제의 입장에서 볼 때 간도특설대는 잘

길들여진 날랜 ‘사냥개’나 다름없었다.


백선엽은 1943년 2월부터 이 부대에서 근무하며 항일독립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자신도 “1943년 2월에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에 주둔하고 있었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됐다.

 

여기서 처음으로 게릴라를 봤고, 토벌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인정하듯이 항일

부대를 대상으로 한 ‘비정규전’을 수행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서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熱河省)과 북경 부근에서 팔로군(八路軍)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는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춘근, 박창암 등과

함께 근무했다.

 

나는 1945년 8월9일 소만국경을 돌파해서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明月溝)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군과 나>)

 

간도특설대를 비롯한 만주군 출신들은 만주군 경력을 인정받아 광복 뒤 한국군의 주역

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백선엽은 광복 뒤 잠시 고향에 머물다가 자신을 찾아온 봉천군관학교·간도특설대의 동료

이던 김백일(봉천 5기), 최남근(봉천 7기)과 함께 월남했다.

 

그 뒤 정일권(봉천 5기)의 소개로 군사경력자들을 찾던 주한미군정을 찾아가 군사영어

학교(군영. 육사의 전신)에 들어갔다.


이들은 군영에 이름만 올려놓고 곧바로 신설된 국방경비대(육군의 전신)의 연대장(지금

군단장급)에 임명됐다.


백선엽은 이후 한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4성 장군으로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 등을 지냈다.

 

‘내면지도’를 받으며 비정규전을 경험한 만주군에서의 경력은 광복 뒤 백선엽이 한국군의

중추가 되는 데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가 참가한 여순사건과 6·25전쟁기의 토벌작전과 육군 정보국장 시절에 주도한 숙군

등은 만주군에서 배운 경험의 연장이었다.

 

만주군 출신들 한국군 중추 돼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의 생활을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 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회고했다.

 

언뜻 보면 자신의 간도특설대 근무를 ‘친일’ 행위였다고 인정하는 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경력이 ‘조국의 독립과는 상관없다’로 만들었다.

 

흔히 ‘친일’ 행적을 덮으려는 인물들은 공통되게 자신의 행적이 ‘조국의 독립과는 상관없다’

거나 ‘모두가 힘들었던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반일(항일) 전선에서 목숨을 내걸었던 분들의 희생은 어떻게 평가할까?

 

경북 안동 임청각의 소유주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과 명문거족의

후예인 이회영의 집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홍범도와 김좌진, 일본육사

(26기)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 1919년 3·1운동 직후 탈출한 지대형(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의 본명)과 김경천(영화 <암살>에서 속사포의 “낙엽이 지기 전 무기를

구해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는 대사의 주인공)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비적’(匪賊)이었나?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사실만으로도 백선엽의 국립묘지 안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는 한 개인이 아닌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들에게 공통된 문제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때문이다.

 

헌법은 다른 법률에 우선하는 ‘최상위법’이라는 것은 중고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그렇기에 친일파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헌법의 첫 구절(전문)부터 부정하는 것이며

몰상식한 행위이다.

 

친일 군인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항일독립운동의 역사가 통째로 부정되는 현실에

직면한다.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현 정부는 국군의 정통성을 광복군에서 찾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상례’를 갖추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국립묘지는 그 나라의 정체성과 연관되는 곳이다. 쉽게 말해 누가 묻히느냐에 따라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렇기에 친일파들이 들어간다면 독립운동이 통째로 부정되는 모순에 직면한다.

 

국립묘지는 국가 정체성과 연관

 

친일파와 관련된 논쟁이 제기될 때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단죄하지 말라’는 주장이

꼬리표처럼 붙는다. 하지만 어제의 기준으로도 맞지 않는 주장이다.

 

1948년 9월22일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제4조 6항은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를 처벌한다고 규정했다.

 

백선엽은 만주군 장교로서 4년을, 그중 3년을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간도특설대원 백선엽이 토벌작전에 출동했을 때 그 총구는 누구에게로 향했을까?

 

반민법에 따르면, 그는 처벌 대상이지 승진 대상은 결코 아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는 수십 년 뒤에 되살아났다. 그렇기에 2005년 설립된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했음에도 논란은 계속된다.

 

그가 간도특설대에서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일제의 ‘사냥개’

부대에서 근무한 장교가 그 경력을 발판 삼아 한국군의 중추가 되고, ‘6·25전쟁 영웅’만

남긴 채 과거를 씻어버린 이 기막힌 ‘역설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노영기 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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