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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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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노산 이은상이 지은 각종 비문
관리자
조회수 : 42   |   2019-02-01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고 나면 묘비를 세우기 위해 비문의 찬술자료인 행장과 유사를 마련하고 적임자를 물색하여 비문을 청탁했다. 신도비는 일반적으로 당대의 문장가, 즉 홍문관 대제학에게 청하는 것이 상례였다. 묘갈명(墓碣銘)은 대체로 3품직 이하의 관료를 지낸 양반층에게 사용되는 것이고 그 이상의 품계를 지낸 이에 대해서만 신도비가 허용되었다. 신도비와 묘갈은 찬문(撰文), 사자(寫字), 전액(篆額)을 위해 각각의 전문가에게 의뢰하였고 이들에게 보내는 예물을 윤필(潤筆)이라고 하였다. 비문을 청탁하고 나면 바로 돌을 사서(買石), 갈아(磨石) 바탕비(白碑)를 만들어 둔다. 그래야만 돌의 크기에 맞게 비문을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문이 마련되면 석공으로 하여금 문자를 새겨 넣고(入石), 길일을 택하여 묘 앞에는 갈석을 세우고(墓道) 동남방에는 비석(신도비)을 세운다.(立石)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효성이 깊은 후손들이 정성스레 수년 간 경비를 모아 돌을 마련한다고 해도 비문을 찬술할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몇 년이고 입석은 지연된다. 사대부라 하더라도 후손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넉넉하지 못하면 엄두도 내지 못한다. 더구나 사대부 계층이 아닌 일반 서민들은 아무리 재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함부로 비석을 세울 수 없다. 비지(碑誌)는 이렇게 사대부층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의 계층적 입장이 죽음 이후에까지 이어지게 하는 지배방식이었다.

이러한 비지는 그동안 크게 세 가지 영역에서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금석학, 문자학, 문장학 등이다. 사적을 오래 유전시킬 목적으로 금속기물(金屬器物)이나 석면(石面)에 새겨 둔 문자를 금석문이라고 하는데 비석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많다. 문자학은 석면에 조각된 글자의 형태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비석을 탁본하여 법첩(法帖)을 만들고 서법을 익히기 위해 임서(臨書)의 자료로 활용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본격적인 금석학 연구의 본보기를 보여준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남겼다.

문학의 유형을 분류할 때 비지(碑誌)는 전기류(傳記類)의 산문양식에 속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전기류 산문을 대표하는 양식은 사전(史傳)이었다. 비지는 사전의 서사전통을 계승하여 후대에 출현했다. 그러나 비지와 사전은 찬술동기가 다르다. 사전은 공적인 계기에서 찬술하지만 비지는 피전자의 후손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쓰기 때문에 친소관계가 개입할 여지가 많다.

 

그래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은 비지서사의 진실성과 공정성을 강조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사실을 덮어두면(掩實)' 친구로서 피전자를 잘 몰랐다는 책망을 듣고 '사실대로 기록하면(紀實)' 후손에게 불만을 사는 것이 비지서사이다. 퇴계는 고인의 행적을 후세에 전할 때는 모름지기 '공허하거나 과장된 말을 늘어놓아서(虛張誇逞)'는 피전자의 참모습을 전할 수 없고 타당성 여부를 가리지 않고 '오직 찬양만을 일삼으면(惟務讚楊)' 후세인들에게 피전자의 실상을 알리는 데 실패하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서사 내용의 왜곡을 유발하는 허장과령이나 유무찬양은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년)은 '비지서사는 거실직서(據實直書)해야 하고 비지용사는 상심적당(詳審的當)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실은 바로 당대 현실이나 사실에 의거해야만 한다는 뜻이고 직서는 숨김없이 진솔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상심적당이란 타당성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거치지 않은 경솔한 용사(用事)도 배척해야 한다는 뜻이다. 농암협이 주장한 거실직서와 상심적당의 원칙은 비지서사의 역사성, 진실성, 공정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사정(私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히 있다. 국문학자 이종호는 '아직도 우리는 허위에 찬 비석이 자연을 훼손해 가면서 이곳 저곳에 세워지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 말 못 하는 빗돌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책에서 이황과 김창협의 생각을 소개한다고 하였다.

 

회갑 축하시와 그리운 이를 추모하는 추모시

노산이 1970년에 발간된 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에 실린 전체 112편 가운데 먼저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시조가 9편이다. 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 횡보(橫步) 염상섭(廉尙燮),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퇴경(退)스님, 효봉(曉峰)스님, 가람 이병기, 외솔 최현배 그리고 설악산에서 희생된 산악 동지들의 영령 앞에 바치는 시조 등이다. 1965년 3월 이북에서 죽은 안재홍 선생 추도식을 위해 쓴 시조에는 '비통한 온갖 사연은 / 역사에 적어두고 / 오늘랑 욕되게 사느니 / 차라리 잊고 가시오 / 땅이사 내 나라 땅이외다 / 거기 묻힌들 어떠리까' 라는 구절이 있다. 같은 시조집의 금석죽조(金石竹弔)에는 자신이 쓴 19편의 비문을 포함시켜 놓았다. 구한말 영국공사로서 조국의 주권이 위태로워지므로 자결로써 세계에 호소한 한말 최초의 순국자인 이한응(李漢應) 열사기념비, 원주 지역의 임야에 저공비행으로 송충 구제약을 뿌리다가 순직한 이순학(李舜學) 공군대위를 위해 원주시에서 세운 비석, 한글 점자 창안자인 박두성 선생 기념비, 파주에 있는 윤관(尹瓘) 장군 신도비명(神道碑銘), 해운대 최고운(崔孤雲) 비명(碑銘)과 함께 운암(雲岩) 김성숙(金星淑)의 회갑, 문학박사 이상백(李相栢)의 회갑, 이헌구(李軒求), 김상기(金庠基)의 축하연을 위한 송시(頌詩), 시인 전규태(全圭泰)의 시조집, 시인 이상범(李相範)의 시조집,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 문집에 실은 축하시조 등이 실려 있다.

 

의암유인석.jpg

▲ 1976년 춘천에 세운 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동상. /전점석

 

운암에 대해서는 회갑 축하시뿐만 아니라 추모시도 썼다.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역임하고 해방 후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한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1898~1969년)이 죽었을 때 추모시를 생전에 가까이 지내던 노산이 썼다. '하늘에 구름이 간다 / 나도 그 구름같이 간다 / 물 속에 구름이 간다 /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 아무리 파도가 쳐도 / 젖지 않고 간다 / 산 위에 바위가 있다 /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 비바람 뒤 흔들어도 / 꿈쩍 않고 섰다'는 묘비문도 노산이 썼다. 운암이 돌아가시기 3년 전에 처음으로 집을 구했는데 집 이름도 노산이 피우정(避雨亭)이라고 지었다. 독립운동가이며 시인, 승려였던 운암은 해방 후 임시정부에서 1946년 1월에 소집한 비상정치회의에도 참여하였고, 1946년 2월 15일에 결성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단에도 선출되었다. 1947년 5월 24일 결성된 근로인민당에 조직국장으로 참여하였다. 4·19 이후 최대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5·16 쿠데타 이후 혁신계로 분류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추모시를 많이 쓴 노산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0여 개의 비문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비문과 관련해서는 노산뿐만 아니라 위당 정인보도 유명하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연희전문학교의 많은 교수들이 체포된 이후 정인보가 강의하던 조선문학강좌도 폐강되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정인보는 일본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그 이듬해부터 광복 때까지 오랜 칩거 생활을 했다. 이때는 주로 묘비문과 제문 그리고 한시와 시조 등을 쓰면서 지냈다. 노산의 경우에도 200여 개의 비문 중에서는 그의 진정성이 담겨있기도 하고 친한 인간관계 때문에 쓴 경우도 있다고 한다.

광복회 부회장인 권영창은 '노산은 수많은 공공단체에 관여하고 있어서 참으로 바쁜 몸이었다. 더구나 모두들 인정하고 있듯이 선생의 비문 실력은 당대에 손꼽히는 대가인지라 각계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응분의 사례금과 함께 비문 작성 청탁이 쇄도하였다. 그러나 각종 기념사업회에서 선생의 고마우신 뜻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하면 노산은 건립사업에 보태라고 이를 사양하곤 했다'고 하였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기리는 비문

전국에 세워져 있는 비문 중에서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그 내용을 통하여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노산이 쓴 비문 중에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리는 비문이 가장 많다. 1966년 10월 파주에 있는 윤관(尹瓘) 장군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두만강 건너 칠백리를 달려

先春嶺 아래 큰 비를 세워

여기까지가 고려땅이라

굵은 글자로 새기고서

팔들고

외치시던 님

그 모습 지금 한번 보고 싶구려

이 무덤에 몸은 계셔도

혼이사 九城에 가 계시오리

오늘은 붓을 쥐고

님의 묘비에 글을 쓰오나

뒷날엔

막대를 던져

북녘 구름을 헤치오리라

 

1964년 남원 만인의총 정화사업 기념비의 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문은 노산이 썼다. 1974년, 사임당공원에 세운 사임당 동상의 제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글은 노산,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1976년, 춘천에 세운 의병장 의암 유인석 동상은 제호를 박정희 대통령이, 글은 노산,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비문 최치원.jpg

▲ 1971년 부산 동백섬에 세운 고운 최치원 유적비.

 

 

1977년, 강화에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를 세웠는데 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글은 노산,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외국에서도 무명용사를 기리고 있다. 우리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미국의 전몰장병기념일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의 무명용사들 무덤에 헌화하는 것이다. 무명용사비에는 '여기에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신 미국의 용사가 영광 속에서 쉬고 있다'는 구절이 적혀 있다고 한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부근에도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고 한다. 모스크바 젊은이들은 결혼식을 마치면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 헌화한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은 무명용사에게 바치는 헌시(獻詩)이다. 작사자인 한명희가 육군 소위였을 때였다. 그는 1964년 중동부전선의 백암산 비무장지대의 잡초가 우거진 산모퉁이에서 이끼 낀 채 허물어져 있는 돌무덤을 발견했다. 녹슨 철모가 뒹구는 무덤 머리에는 십자가 모양의 비목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신미양요의 치열한 전적지인 강화에는 같은 해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도 세웠는데 역시 휘호는 박정희 대통령이, 글은 노산, 글씨는 일중 김충현이 썼다.

부산 수영 사직공원 안에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안용복 장군 충혼탑을 1967년 10월에 세웠다. 충혼탑에는 이은상이 쓴 탑 명이 새겨져 있다. 독도지킴이 안용복(安龍福)은 숙종 시기인 1693년에 일본 본토에 가서 막부의 고위 관료 앞에서 당당하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여 일본이 인정하게 만든 인물이다. 당시 대마도주가 죽도에 우리 어민들이 들어왔다며 울릉도를 슬쩍 죽도인 양 기만하려하자 그는 조종의 강토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다고 주장해 죽도는 무시한 채 울릉도에 대한 소유를 못 박았다. 안용복은 조선과 일본을 상대로 이중플레이를 펼치며 울릉도를 편입하려했던 대마도주의 행위를 고발해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고하게 만든 인물이다.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그를 참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남구만 등의 변호로 처벌을 늦추었다. 그는 비록 조선의 현실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 대상이었으나 이미 기개 있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부산에는 노산이 쓴 비문이 또 있다. 경주 최씨 부산종친회가 관리하는 최치원 선생 유적비와 동상이 1965년, 1971년에 각각 해운대 동백섬에 세워졌는데 역시 비문은 노산이 썼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장군(1552~1617년)이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전국에서 최초로 북을 매달고 쳐서 의병을 집결한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는 현고수(懸鼓樹·천연기념물 제493호 정자, 느티나무) 앞에도 1978년 8월에 노산 이은상이 짓고 청남 오제봉이 쓴 유허비 비문이 있다. 유곡면 세간리는 망우당이 태어난 외갓집이다. 유허비(遺墟碑)란 선현의 자취가 남아있는 옛터를 후세에게 널리 알리고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를 의미한다.

충북 충주시 풍동에 있는 조선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묘에 있는 '충민공 임경업 장군 묘역 정화 기념비문'을 노산은 돌아가시기 4개월 전인 1982년 5월 15일에 썼다. 이 기념비를 세운 임경업 장군 기념사업회는 1976년 12월에 창립되었다. 노산은 초대 이사장이었으며 이듬해인 1977년에 기념사업회에서 <충민공 임장군 요람>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경북 상주군 화동면 판곡리 낙화담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절곡(節谷) 김준신 의사(1561~1592년)의 제단비와 재실이 있다. 이곳에 이은상이 쓴 낙화담 의적 천양시비(落花潭 義蹟 闡楊詩碑)가 세워져있다. '임진년 풍우 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났네 / 節土谷 피묻은 역사야 어느 적에 잊으리'.

경주에는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김유신을 모신 통일전과 김유신 동상이 있다. 사적비 맞은편에 세워진 삼국통일기념비 뒷면에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건립취지문을 일중 김충현이 썼다.

 

석주 이상용 구국기념비.jpg

▲ 1963년 대구 달성공원에 세운 석주 이상용의 기념비. /전점석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그리워하는 비문

두 번째는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비문을 많이 지었다. 아래 시조는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석주(石洲) 이상용(李相龍·1858~1932년) 선생을 기념하면서 1963년에 쓴 비명(碑銘)이다.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져 있다.

 

나라가 무너지자 압록강 울며 건너

찬 바람 만주 벌에 흰머리 날리시며

한평생 조국광복을 꿈 속에도 비시더니

거기가 어디관대 그 땅에 묻히셨소

그 소원 이룬 오늘 님은 정작 안계시네

혼을랑 돌아오소서 길이 여기 곕소서

 

1965년, 밀양 영남루의 광장에는 이 지역 출신의 독립의사, 열사 숭모비가 있는데 비문은 이은상이 글을 짓고, 유민목(柳敏睦)이 글씨를 쓰고, 숭모비건립위원회가 세웠다. 노산은 비문의 끝부분에서 '화악산(華獄山) 우러보니 푸른 얼 서리었고 / 남강을 내다보니 붉은 뜻 벋히었네 / 이 강산 이 겨레 하냥 길이 사시오리다'라고 했다. 최근 이 숭모비의 내용에 12가지의 오기와 오류가 있다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에 조성되어 있는 안씨 추모공원에 있는 백산(白山) 안희제(1885~1943년) 추모비문을 노산이 썼다. 보재(溥齋) 이상설(1870~1917년)의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산직마을)에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가 1971년 숭모비를, 1975년에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렬사(崇烈祠)을 지었다. 보재의 행적을 담은 숭모비의 비문은 이은상, 비명은 이범석이 짓고, 글씨는 이상복이 썼다. 보재는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탄생해 1917년 연해주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순국하였다.

 

전남 보성군에 있는 송재(松齋) 서재필의 기념관 근처에는 한인회가 세운 대형 대리석 기념비가 있는데 서재필 전기를 쓴 이정식 교수(펜실베니아 대학)와 노산 이은상이 쓴 비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노산은 서재필의 생애를 적었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년)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의사였다.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 협회를 설립했다. 그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병사하였다.

노산은 비문과 추모시뿐만 아니라 비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다.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재단에는 이상설, 이위종 열사, 홍범도 장군, 유관순 열사 등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후손이 없거나 유해마저 찾을 길이 없는 순국선열 117위 및 정인보, 조소앙 등 6·25전쟁 당시 납북된 독립유공자 16위 등 총 133위의 순국열사의 위패를 봉안해두고 있다. 이 재단은 1975년 8월 15일 광복 제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후손이 없는 선열의 재단 건립위원회'에서 묘소도 없고 후손도 끊어진 선열의 위폐를 안치하고자 국고보조를 받아서 건립하였다. 이 건립위원회의 대표가 노산 이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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