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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상해 떠나 8년 만에 중경 정착... 임시정부 법통 지켜
관리자
조회수 : 2931   |   2018-11-05


기강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모습(1939.11)



<2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장정(하) 

  
손문의 호법정부 임시정부 정식 승인 
中, 韓 독립운동 적극 지원 의사 표현 
기강 시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 
최종 종착지 중경…한국광복군 창설 


광주 시기 임시정부 청사 동산백원

유주 시기 임정 요인의 숙소 낙군사

유주에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 대 모습(1939.4)

광주는 중국 국민혁명의 성지다. 신해혁명을 이끈 손문의 고향이자 중국국민당과 호법정부가 출범한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손문의 호법정부는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러시아 레닌정부에 이어 두 번째로 승인함으로써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준 것이다.


임시정부 광주 동산백원에 근거지 마련

이때 임시정부 외무총장 신규식에게 손문은 “한·중 양국은 본래 형제의 나라이고 오랜 역사 관계가 있어 잠시도 분리될 수 없으니 마치 서방의 영·미와 같습니다. 한국의 복국운동에 대해 중국은 마땅히 원조할 의무가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드러냈다.

이뿐만 아니라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직후 이곳에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이 설립되자 한국 청년들이 대거 입학했다. 훗날 걸출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김원봉·박건병·김성숙·김산(장지락)·이육사 등 이들 학교 출신이 많았다.
당시 광동성 주석은 오철성이었다. 손문처럼 광동성 향산(중산) 출신인 오철성
은 임시정부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장개석과 장치중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철성은 1932년 1월 상해사변 즉 송호전쟁 시기 상해시장이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대해 잘 알고, 윤봉길 의거도 직접 목격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임시정부가 동산백원(東山柏園)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가족들이 아세아여관에 들 수 있었던 것도 오철성의 호의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군 폭격 피해 광주서 유주로 이동

하지만 임시정부의 광주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일본군의 광주 시내 폭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북경과 천진을 함락한 뒤 대륙타통(大陸打通)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북경에서 광주에 이르는 주요 도시를 점령해 이들을 점(거점)과 선(철도)으로 연결하는 군사작전이었다. 일본군의 공습이 계속되자 임시정부는 거처를 광주 시내에서 벗어난 작은 시골 도시 불산(佛山)으로 잠시 옮겼다.

그런데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다. 일본군이 광동성에 상륙한 것이다. 그래서 광주에 도착한 지 석 달 만에 허겁지겁 짐을 꾸려 광동성을 빠져나왔다. 오철성이 교통편을 마련해 주어 그나마 이동이 가능했다. 연로한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100여 명이 버스와 배로 광동성 북서쪽 내륙 깊숙한 곳으로 재차 대장정에 나선 것이다. 1938년 10월 도착한 곳이 바로 광서성 유주였고, 다음해 4월까지 6개월간 머물렀다.

유주에서 임시정부와 요인들은 낙군사(樂群社)라는 여관에 자리 잡았다. 여기서 1939년 2월 임시정부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라는 무장투쟁 조직을 결성했다. 임시정부 지지 정당인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우파 항일 연합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 소속의 청년들이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위해 발족한 것이다.

좌파 항일 연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이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라는 무장부대를 결성한 직후였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유주에서 항일 선전활동을 펼치면서 장차 광복군으로 발전을 기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시가행진과 반일전쟁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공연해 중국인민의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의연금을 모아 부상한 중국 장병들을 위문하는 등 선무활동을 펼쳤다.


기강서 독립운동세력 통합·광복군 준비

유주 시기 김구는 임시정부와 가족들을 임시 피난수도인 중경으로 이동하는 문제를 중국정부와 교섭했다. 당시 중경은 인구 20만에 불과한 소도시였다. 그런데 중경이 임시 피난수도가 되자 각지의 정부기관과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갑자기 인구가 200만 명 이상으로 급증해 심각한 주택난과 물가폭등 현상이 발생했다. 임시정부가 유주에서 중경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중경 코앞의 소도시 기강에 자리 잡게 된 이유다.

임시정부는 1939년 4월 유주를 떠나 기강에 도착했다. 1년6개월간의 기강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세력 통합과 광복군 결성을 준비해 나갔다. 1939년 8월 ‘7당 회의’와 ‘5당 회의’를 열어 정당 통일운동을 펴고, 11월 청년들을 규합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면서 서안으로 군사특파단을 보낸 사실이 잘 말해준다.

임시정부가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중경으로 옮긴 때는 1940년 9월이다. 1932년 5월 상해를 떠나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의 대장정 기간은 8년을 넘고, 그 거리는 3만리에 달한다.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이 1934년 10월 서금을 떠나 1936년 10월 연안에 도착하기까지 2년이고, 거리도 만리 안팎인 것에 비해 봐도 그야말로 대단한 역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의 대장정이었지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00여 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가며 불굴의 의지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키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중국정부와 공동 항일투쟁의 기반을 닦고, 독립운동세력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하며 무장부대를 조직해 간 것이다.

그 결과 중경 시기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으며,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선포해 새 국가건설의 청사진을 밝히고, 좌우 통일의회와 연합정부를 형성해 광복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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