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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관리자
조회수 : 742   |   2024-04-11


[나는 역사다] 김성숙 (1898~1969)

젊은 시절 스님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1923년에 유학을 구실로 중국 땅에 건너갔다. 고려유학생회를 이끌며 학생운동을 했고 의열단에 들어갔다. 중국 공산당의 무장 봉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열혈 청년’ 김성숙은 1930년대 후반에 대중정치로 노선을 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그렇다고 자기 과거를 부정하고 반공 노선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다. 

1945년 해방 직전에 이승만이 소련을 맹렬히 비난하자 김성숙은 이를 비판한다. 이렇게 이승만과 척을 진다.

1945년 12월에 한국 땅에 돌아온다. 중국 땅의 가족과 헤어진 다음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해방공간에서 좌파와 우파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운형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추진하던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1946년에는 미군정을 비판했다는 구실로 여섯 달 옥살이를 한다.

그러다가 남한에 우파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김성숙은 현실을 받아들인다. 6·25 전쟁이 터지자 남쪽에 남기를 택한다. 그렇다고 극우 정권과 야합한 것은 아니다. 

한결같이 야당 정치인으로 살았다.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했다. 조봉암이 진보당을 창당할 때 관여했다. 1957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여섯 달 동안 옥살이를 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난 뒤에도 혁신계 정당 운동의 고된 길을 택했다. 5·16 쿠데타가 터진 다음 또 잡혀가 열 달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대중적인 야당 활동을 했다.

김성숙은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무장투쟁에서 의회정치로, 비밀조직활동에서 대중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렇다고 옛날에 운동했던 

자기 과거를 팔아 반공주의자로 전향하지 않았다. 김성숙은 끝까지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렸다. “돌이켜 생각할 때 소위 나랏일을 한답시고 

집안 살림을 돌아보지 못하여 폐를 끼치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탄식했다. 세상을 떠난 날이 1969년 4월12일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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