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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달의독립운동가] 오광선·정현숙 독립군부부
관리자
조회수 : 1353   |   2020-04-01


◆ 생몰연도 : 오광석 1896.05.14 ~ 1967.05.03

                      정현숙 1900.03.13 ~ 1992.08.01


◆ 훈     격 : 오광석 건국훈장 독립장 (1962년)

                    정현숙 건국훈장 애족장 (1995년)

 

◆ 주요공적(오광석)

    ▷ 1920년 대한독립군단 중대장으로 독립군 지휘

    ▷ 1931년 한국독립군 의용단 중대장

    ▷ 1934년 낙양군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간부 육성

 

   주요공적(정현숙)

    ▷ 1919년 남편 오광선과 함께 만주로 망명

    ▷ 1919년 ~ 1935년 독립군 지원

    ▷ 1941년 ~ 1944년 한국혁명여성동맹, 한국독립당 활동


◆ 오광선 공적상세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였다. 이어 서로군정서 별동대장을 거쳐 경비대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국민회군(國民會軍)의 홍범도(洪範圖),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이청천(李靑天), 청산리에서 대승한 북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 등이 밀산(密山)에서 만주 독립군을 통일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명지휘관으로서 조동식(趙東植)등과 함께 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 연합군은 노령 자유시(露領自由市)로 이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에 흑하사변(黑河事變)에 봉착하는 일대 수난을 겪었다.

 

1930년에는 한족회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로 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으며,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비하여 한국독립군이 편성되자 그는 의용군중대장으로서 총사령장관 이청천(李靑天), 부사령장관 남대관(南大觀), 참모관 신 숙(申肅)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12월 11일 그는 사령관 이청천을 수행하고 최 악(崔岳)·심만호(沈萬浩) 등과 함께 중국 호로군사령관 정 초(丁超)를 방문하여 한·중 연합군을 구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군과 대적할 것을 약속하고 대일전을 계속하였다.


1933년 7월초에는 수분하 대전자(綏芬河大甸子)에서 일군 대부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한·중 연합군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그후 동녕현(東寧縣)의 일군을 계속 추격하다가 실패로 끝나자 한·중 연합군은 내분이 일어나 이청천등이 구속되니 독립군은 자연히 흩어지고 말았다.


이청천등은 석방되자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광복군 충추장교를 양성할 책임자로서 20여년간 피흘려 항쟁하던 동삼성(東三省)을 뒤로 하고 황학수(黃學秀)·김관오(金官五)·김학규(金學奎) 등과 그를 대동하고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하였다.


1933년에 김 구(金九)가 남경(南京) 중앙군관학교에서 장개석과 면담, 이 자리에서 낙양(洛陽) 군관학교내에 한국독립군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하여 군 간부를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게 되자, 총책임자 이청천을 비롯하여 교성대장(敎成隊長) 이범석(李範錫), 교관으로는 그와 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 등이 초청되어 광복군 양성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1940년 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재차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8·15광복으로 귀국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육군대령으로 임관되었다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정현숙 공적상세


1918년경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부군 오광선(吳光鮮)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후 1935년까지 만주 길림성(吉林省) 일대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이후 중국 남경(南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여 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44년경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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