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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관리자
조회수 : 1617   |   2019-12-01


윤봉길 ( 윤봉길 尹奉吉, 1908.06.21~1932.12.19. 충청남도 예산, 대한민국장 1962 )

 

 

윤봉길 의사의 이름과 장쾌한 의거의 내용을 아는 이는 많아도 25세의 짧은 생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친 그의 인간적 풍모를 아는 이는 그리 흔치 않다.

1920~30년대의 시대상황 속에서 시골 벽지의 한 청년이 대한의 열혈의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더듬어 보는 것은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들 생활의 지표를 점검한다는 뜻에서도 의의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尹墴)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종살이 되라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오치서숙을 나온 후에도 홍성의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홍주의병의 항일정신을 배웠다. 의사는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동아일보』와 민족잡지인 『개벽(開闢)』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와 증산운동, 공동판매 공동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稧)·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드디어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의사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1931년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고 앞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가와바타와 시게미쓰 사이에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파편이 사방으로 날았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쓰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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