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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관리자
조회수 : 1944   |   2019-02-26


생몰연도 : 1861 ~ 1922

 

훈격 대한민국장 (1962)

 

공적개요

 

- 1894년 호서지방 중심 북접의 사령관인 통령에 오름

-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제3대 교주취임

- 1910년 보성학교, 동덕학교 인수하여 민족교육운동 전개

- 1919년 3·1 독립선언 주도로 체포, 2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병사


공적상세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하여 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약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의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선생이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군과 합세하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남북접연합군은 일본군의 불법개입으로 인해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동학혁명운동의 열화 같은 의지는 좌절되고 선생은 강원도 태백산맥과 원산·강계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그는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의 경험은 선생으로 하여금 종래 동학농민혁명에서 보여주었던 항일적 무력항쟁의 노선에서 일본을 통한 문명개화운동의 노선으로 방략을 변경하는 기점이 되었다. 선생은 일본에서 권동진·오세창·박영효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2차에 걸쳐 총 64명의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유학을 주선하고 신문물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함으로써 민족의 동량(棟樑)으로 육성코자 하였다. 또한 1904년에는 동학교인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게 하고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는 흑의(黑衣)와 단발로 상징되는 서구적 문명개화운동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고 이 기회를 이용, 부국강병의 대책을 세워 국가만전(國家萬全)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시세를 잘못 판단한 이용구가 진보회를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선생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다음해에 귀국하여 친일화된 일진회와의 단절을 서둘렀다. 선생은 사태수습을 위해 일진회에 가담한 천도교인들에게 탈회하여 종교적 활동에 전념케 하였다. 그리고 이를 따르지 않는 이용구 등 천도교인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출교를 당한 천도교인들이 나가 별도로 시천교를 세우고 활동하자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단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러나 성미제(誠米制)의 실시로 손병희는 천도교의 재정 상황을 개선하였고, 적극적인 포교 활동으로 교세를 신장시켰다.


그러나 선생은 여기에 만족할 수만은 없었다. 선생은 국권을 수호하고, 또 회복하기 위해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보성사(普成社)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를 발행하여 교인을 계몽시키는 한편 『만세보』와 각종 서적을 발간하여 일반인의 계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선생은 보성학교(현 보성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고등학교와 동덕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문창·보창·명신·양영 등 수십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하여 운영함으로써 민족의 동량을 육성하였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는 사범강습소와 수 백 개의 교리강습소를 설립하여 운영함으로써 천도교의 인재를 양성하였다. 즉 선생은 1910년대 종교활동과 교육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역량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학을 믿었기 때문에 국가적·민족적 신념이 강하였다. 그리고 종교철학적인 측면에서도, 선생은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여야 한다는 생각 하에, 동학농민혁명과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였듯이, 3ㆍ1운동을 이끌려고 작정하였다. 또 선생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선생은 일본이 합병 시에 일시동인(一視同仁)한다고 표방하고 조선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데에 심한 불만이 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발맞추어, 대량살상과 대량파괴의 기존 문명을 비판하고 이상적 인류사회를 만들려는 개조사상이 유행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에 따라 식민지의 해방 움직임이 있자, 선생은 우리 민족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모색하였다. 선생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신문 등을 통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의 지도자와 함께 우리 민족의 자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행정 자치를 청원하는 방식의 운동을 모색하다가 1919년 1월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즉 선생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리고,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의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측근들에게 독립운동의 세부추진계획을 일임하였다. 일본에 망명하거나 유학한 천도교 내의 문명개화파인 이들이, 국제 정세에 밝고 대한제국기의 관리 및 일본 유학생 등과 널리 친분이 있어, 일의 처리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박영효·한규설 등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거족적인 항일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방향을 전환, 독자적인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던 기독교측과 연합하기로 하고 기독교계의 남강 이승훈(李昇薰)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어 만해 한용운(韓龍雲)을 통해 불교계의 동참이 이루어졌으며 유교계(儒敎界)와의 연계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또 연희전문·보성전문·세브란스 의전 등 각 학교학생들이 추진하던 독립운동계획도 이에 통합하여 바야흐로 전 민족적 거사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다.


손병희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大衆化)·일원화(一元化)·비폭력화(非暴力化)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그리고 1919년 1월 초 전국의 교인들에게 ‘49일기도회’를 실시하게 함으로써 3·1운동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다지도록 하였다. 이윽고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선생은 직접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검토가 이루어진 후,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천여매(3만 5천매라는 학설도 있음)의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이어 기독교의 함태영과 이갑성, 천도교의 이종일, 불교의 한용운 등을 통해 각 종교의 전달자에게 전해졌고, 이들을 통해 전국 각지로의 배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선생은 민족대표를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2월 20일~27일까지 자신과 권동진, 오세창, 최린 외에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양한묵, 이종일, 이종훈,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 등 15명을 천도교의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거사일은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원래 광무황제의 인산(因山 : 장례일)은 3월 3일이었으나 인산 당일에 거사하면 장례식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하여 3월 2일로 하려 했다. 그런데 이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의 반대로 토요일인 3월 1일로 거사일을 확정한 것이다. 그리고 거사장소는 탑골공원으로 정해졌다.


선생은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가 모인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사람을 보내 독립선언서에 날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 자신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배포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우려한 것이다.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선생과 다른 민족대표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러시아·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의 영향은 국내외 각지에서 8개에 달하는 임시정부의 출현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의 통합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3·1운동 직후 의 ‘전단정부’인 대한민간정부(기호지방)와 노령정부에서 선생을 대통령에 선임하였으나, 선생은 정치인보다 종교인으로서 사회를 교화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다만 선생은 3·1운동 후 독립된 국가의 정체가 민주공화제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우이동의 수련원에서 “전쟁이 끝나면 세계의 상태가 일변하여 세계에 임금이란 것이 없어지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3·1운동 후 일제 관헌의 신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자신은 민주정체를 원한다.”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당당히 밝혔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 62세였다.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독립된 국가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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