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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전덕기
관리자
조회수 : 1807   |   2014-03-06


(1875.12.8 ~ 1914.3.23) 순국 100주기 

 ◈구국의 생기를 불어 넣은 선각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전덕기 선생을 순국 100주기를 맞이하여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상동교회 목사로 상동청년회 및 상동청년학원을 통하여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신민회 창립 핵심인사로 항일구국운동을 선도하였다.

선생은 1875년 12월 서울 정동에서 부친 전한규, 모친 임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세 되던 해 부모 모두를 여의고 숯장수인 삼촌댁 양자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7세 되던 해 당시 서울 정동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하던 감리회 소속 선교사 스크랜턴과의 만남을 통해 선생의 삶은 결정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1885년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시병원을 설립하고 민중 지향적 선교를 전개한 인물로서 선생은 그의 민중 지향적 목회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병원의 고용인으로 스크랜턴의 활동을 돕던 선생은 21세 되던 해 기독교에 입교하여 상동교회 창설사업에 참여하였고, 1902년 마침내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었다. 선생은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한 결과 "민중 전도자"로서의 이름이 점차 교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03년 선생은 상동교회 내에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정순만, 박용만 등과 함께 독립협회해체 이후 흩어졌던 민족운동 세력의 재규합을 위해 힘썼다. 이후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을사늑약 반대, 일제의 군용지 매수반대, 일진회등 친일어용단체 반대 투쟁 등 반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선생은 1897년 상동교회 안에 초등과정의 공옥여학교, 1899년 공옥남학교를 설립하고, 1904년 민족지도자급 인사들과 함께 중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사업을 전개하였으며,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주요 인맥인 "상동파"의 중심인물로서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통해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확보 사업 등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10년 일제는 국내의 반일민족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사건을 허위로 조작하였다.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자, 선생은 조직을 재구축 하는 일과 신흥무관학교 등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구속된 이승훈의 오산학교와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의 운영을 맡아 보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구국운동의 개척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선생의 생애는 39년으로 비록 짧았지만, 기독교 정신을 온 몸으로 구현한 "민중 목회자"이면서 방대한 항일민족세력을 구축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활력을 불어 넣은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다한 삶이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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