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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노병대선생
관리자
조회수 : 2061   |   2013-10-31


11월의 독립운동가 노병대선생

(1856.12.30 ~ 1913.7.10)


◈외눈이 되어도 굴하지 않은 의병정신의 신화◈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노병대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속리산에서 거의하여 삼남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한 눈을 제거당하고 유형 10년을 받았으며, 다시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단식 28일만에 순국하였다.

선생은 경북 상주군 화령면 관제리에서 아버지 노종주와 어머니 의성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기호 남인학자이며 당대 유림의 거두인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989년 34세에 창릉참봉이 되었다.

1882년 선생은 조선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무사를 모집하여 군란에 관련된 인물의 제거를 모의하였고,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진사 허운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타개를 위해 적극 참여하였다.

1905년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일본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선생은 북향통곡하고 서울로 올라가 거사를 간청하여 고종황제로부터 밀조를 받아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이강년 의진에서 좌종사로 참여하였다.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임용헌, 충남 연산군에 사는 김운로, 송창헌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서울시위대 및 청주진위대의 해산병을 규합하여 군중이 1천여 명에 이르렀고,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여 충북 보은, 청주, 경북 상주, 경남 안의, 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이후 1908년 보은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 중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체포 후 일경에 의해 한 눈을 잃은 선생은 이후 폭도내란죄로 기소되어 10년 형의 유형을 선고받았으며,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특사로 풀려났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항거하다가 강제로 출옥되었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의병 재기를 위하여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1911년 선생은 부하들을 이끌고 풍기에서 군자금 모집하였고, 함창의 한익원과 함께 상주읍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1912년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한 후 안동의 참봉 유시일의 집에 돌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1913년 3월 12일 체포되어, 191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하다 단식 28일만인 1913년 7월 10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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