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공지사항

공지사항

게시판 내용
8월의 독립운동가 강영소 선생
관리자
조회수 : 1914   |   2013-08-01


8월의 독립운동가 강영소

(1886.2.18 ~ 1934.8.24)

◈독립운동 명문가문! 미주 한인사회의 선구자◈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영소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고, 흥사단 간부 및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맡아 동포사회를 이끈 지도자이다. 선생의 부친과 5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가족 4명이 건국훈장에 추서되는 등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에서 1886년 2월 18일 태어났다.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한 선생은 에와농장에서 설립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에 국권회복의 후원과 교민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합동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할 때 선생은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한인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가 결성될 때 양 단체의 합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1910년 2월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출범하자 선생은 하와이지방총회의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1910년 10월 미주 본토로 이주한 선생은 신한민보사의 총무원으로 일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재무와 중앙총회의 서기,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3년 5월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고,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를 총회에서 직접 관할하도록 하고, 국어교육의 강화, 새 이민자의 관리, 실업부의 설치 등을 주요 사업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스티븐스 포살사건으로 형이 집행 중이던 장인환의 석방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행동통일을 위해 선생을 하와이에 파견하였다. 선생은 황사용과 함께 대립하던 하와이의 국민회와 독립단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고, 1920.1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어 교포사회의 결집과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1923년 시카고로 이거하여 임시정부재정후원회 위원, 신한민보사 시카고지국장 등으로 10여년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26일 별세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부친과 5형제가 모두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부친 강명화 선생과 동생 강영문 선생이 각각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동생 강영각 선생이 1997년 건국포장을 서훈받은 독립운동의 명문가문이다.

정부에서는 2011년 선생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



file0 File #1   |   8월(강~1.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제68주년 광복절, 태극기를 꼭 게양합시다!
다음글 제 68주년 광복절 경축행사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