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공지사항

공지사항

게시판 내용
3월의 독립운동가 양전백(梁甸伯)선생
관리자
조회수 : 1576   |   2013-03-07

 

3월의 독립운동가 양전백(梁甸伯)선생
(1870.3.10 ~ 1933.1.17)
 
◈3․1운동의 불꽃을 점화시킨 민족대표 33인◈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양전백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28일(목) 밝혔다.

 선생은 명신학교,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 등의 설립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자주독립을 주창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의 후예로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선생은 15세에 과거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며, 1892년 김관근과 함께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접하고 평북 구성으로 돌아와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1894년 12월 청일전쟁으로 평안도 일대가 온통 싸움터가 되어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선생은 1896년 12월 평양에서 휘트모어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통역을 하였다. 평북지역에서 휘트모어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세우고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찬조를 받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평북 일대의 교회들은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어 시설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러일전쟁의 처참한 경험은 평북 일대의 교회들을 사실상 관장하던 선생에게 약소민족의 설움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선생은 1906년 선천읍교회 교인들과 함께 신성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보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지도자를 양성하였고, 1908년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1907년 6월 선생은 길선주 등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안북도와 남만주 일대를 순행하는 목사로 2년간 시무하였다.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기독교 각 교파 교역자 17인을 초청해 일본시찰을 시키고 회유하려 하였다. 선생을 비롯한 시찰단 일행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제는 이듬해 10월  ‘데라우치 총독모살 미수사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선생을 비롯한 신성중학교 학생과 교사들을 체포하였다. 모진 고문과 장기간의 법정투쟁 끝에  1913년 3월 무죄로 풀려나 1년 6개월 만에 다시 교단에 선 선생은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제5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전국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떠올랐다. 총회장을 역임하며 한국장로회의 원로 반열에 오른 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함으로써 또 한번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선생을 비롯한 29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출동한 순사들에 전원 연행되었다. 선생은 취조 과정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적합하지 않으며, 한국인은 일본인과 도저히 동화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마포의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선천 북교회의 담임목사로 다시 시무를 시작하였고, 1927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아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머물며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선천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다가 1933년 1월 17일 64세를 일기로 선천 천북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운암김성숙선생 제44주기 추모재
다음글 『 기념관 명예건립추진위원장 이희호여사 예방 』